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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헐리우드의 제왕 클라크 게이블의 일생

by winter-art 2023. 8. 3.

한국에는 1957년에 극장 개봉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80년대 텔레비전을 통해서 보았을 때도 감동이 넘쳤습니다. 남자 주인공 클라크 게이블과 여주 비비안 리는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커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둘의 사랑은 현실에서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일단 클라크 게이블에게는 생애 최고로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요. 비비안 리는 그에게서 나는 입냄새를 몹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청결의 왕자가 헐리우드의 제왕이 되기까지

 

40년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섹시한 배우 그리고 험프리 보가트를 1위로 지명한 미국 영화 협회에서는 클라크 게이블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배우 7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윌리엄 클라크 게이블은 1901년 2월 1일 오하이오주 캐디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석유 시추일과 농부였고 그의 어머니는 게이블을 낳고 몇 달 후에 뇌전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몇 년 후 게이블의 아버지는 피아니스트와 재혼하였는데요. 계모는 클라크 게이블에게 일찍부터 청결의 개념을 심어주고 음악 교육을 하여 게이블은 어릴 때부터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깔끔하게 잘 컸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게이블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아버지를 졸라 문학전집 72권을 사달라고 조른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아버지는 아들이 사냥이나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고 문학과 음악에만 빠져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게이블은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자동차 차량 구성 원리를 한참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13살 때는 시립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한 적이 있던 게이블은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자 16살 때 학교를 그만둡니다. 아버지는 그가 농부가 되길 원했지만 게이블은 공장에 취직하겠다며 타이어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청결한 정비공 혹은 섬세한 농부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었겠지만 게이블은 극장에서 두 편의 영화를 본 후 배우의 꿈을 키우게 됩니다. 185cm의 건장한 체구에 짙은 헤어컬러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매의 그는 정비공이나 농부와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배우가 되기에 탁월한 외모도 아니었습니다.

 

꿈은 가졌지만 이렇다 할 방법을 알지 못했던 클라크 게이블은 뉴스보이부터 극장 잡역 심지어 나뭇꾼 일을 하기도 했는데요. 이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 있는 극장 매니저 조세핀 딜러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배우의 자질을 갖추어 놓은 첫 번째 아내

 

여배우들도 열 살 이상의 남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924년 클라크 게이블은 스물 세 살에 14살 연상의 조세핀 딜러와 첫 번째 결혼을 하게 됩니다. 조세핀은 그의 벌어진 치아를 다듬는 데 주력하였고 무성한 눈썹을 손질하였고 발음 교정 및 배우로서 갖춰야 할, 그러니까 거의 유인원에 가까워 보이는 클라크 게이블을 보기 좋은 상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녀 덕분에 그의 단정한 치아와 웃을 때 생기는 보조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요. 1956년에는 치과 협회에서 건치 배우로 상도 주었답니다. 물론 그의 치아는 모두 도자기로 만든 의치였습니다. 그전에는 틀니를 끼고 다닌 걸로 알고 있고요.

 

 

 

또한, 미처 몰랐던 사실은 클라크 게이블은 남들보다 상당히 큰 귀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 관계자들은 그의 큰 귀때문에 더욱 유인원처럼 보인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요. 코끼리처럼 펄럭이는 귀를 소유한 것이 인상적이긴 합니다. 초기에는 관계자들이 그의 귀를 어떻게든 가려보려고 했지만 게이블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면 뉴욕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1930년 인지도가 생기면서

 

첫 번째 부인의 노력 덕분에 게이블은 배우로서 인기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30년 첫 번째 부인하고는 이혼하고 다음 해 돈이 엄청 많은 애 둘 딸린 마리아 랭엄과 두 번째 결혼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 부인은 그보다 17살이나 많았지만 그녀는 게이블의 할리우드 입성과 자리를 잡는데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 당대 최고 배우 조앤 크로포드와 함께 작업하면서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스캔들의 주인공이 됩니다. 스캔들이 처음 났을 당시 둘은 부인했지만 30년이 지나서 조앤 크로포드는 실토하였습니다. 우리는 바람을 피웠고 남들이 아는 것보다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했다고 말입니다.  조앤과 클라크는 여러모로 통하는 점이 많았습니다.

 

특히 청결을 중시하다못해 결벽증으로 유명했던 조안과 역시 가슴과 겨드랑이 털을 다듬으며 청결에 대해 민감하게 군 클라크의 코드가 잘 맞은 것이지요. 조앤이 클라크와 결혼을 망설인 이유는 둘이 최고로 불꽃이 튀던 시기에 나이 많은 둘째 부인이 가로막은 것도 있겠지만요. 클라크는 좋은 사람이지만 불성실한 남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했기 때문입니다. 둘 다 할리우드에서 알아주는 편력의 소유자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조앤이 펩시콜라 사장을 자신의 최애 남편으로 꼽았던 것처럼 클라크 게이블도 생애 가장 사랑하는 아내 캐롤 롬바드를 만난 후 조앤과는 그저 좋은 친구로 지냈으리라고 봅니다.

 

 

 1939년 리즈 시절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0년대 초반 게이블은 최고 인기 배우가 되었고 그는 헐리우드 최고의 바람둥이로 등극하였습니다. 1935년에는 함께 촬영한 여배우 로레타 영을 임신시켰고 친 딸 주디가 생겼지만 대중을 속이기 위해 입양한 것처럼 키우다 훗날 전모가 밝혀지게 됩니다. 물론 클라크 게이블은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39년 클라크 게이블은 경력의 정점에서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의 인생 중 가장 사랑했던 여자 캐럴 롬바르와 만나 결혼하기 위해 두 번째 부인 마리아에게 재산의 반을 떼어주고 막대한 위자료를 지급해야 했지만 망설임 없이 지불했고요. 이혼하자마자 같은 해 캐럴과 결혼하며 비로소 안정과 행복을 찾게 됩니다. 

 

 

 

그를 세계 최고의 스타, 헐리우드의 제왕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캐럴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초이즘을 유지하고 싶어 했던 게이블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남주 역할이 나약해 보이는 것 같아 망설였다고 하는데요.

 

그는 평소 성격도 그렇지만 극중에서도 화를 잘 내고 오만하고 짓궂고 그러면서 호감 가는 행동을 하는 전형적인 츤데레 캐릭터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영화 속에서 강인한 마초 성향을 부각하는 것을 중시하고 고수하였는데요 캐럴이 시나리오가 아닌 소설책을 그에게 건네주면서 자신이 맡을 스칼렛 역이라면서 읽어 보라고 하였다네요. 책에 빠진 그를 설득해 레트 버틀러 역을 하라고 권유한 현명한 캐럴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게 되고 영화 속 대사에서 레트 버틀러가 했던 말인 내 사랑,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아, 란 대사는 역대 영화 명대사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인생 최고 리즈 시절에 찾아 온 비극

 

 

 

캐럴과 클라크는 한적한 목장에서 살면서 아이를 낳기 위해 주력하는 동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역대급 흥행과 둘의 사이를 시기한 오피스 와이프 조앤은 1940년 함께 촬영한 작품에서 재회하면서 노골적으로 질투심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조앤이 갖은 말로 클라크의 행복을 방해해도 아랑곳하지 않았고요. 

 

한편, 캐럴 롬바르는 애국심도 넘쳐서 다른 여배우들이 동참했던 것처럼 그녀도 전쟁 채권을 홍보하려 각국을 돌아다녔는데요. 1942년 코미디 영화 사느냐 죽느냐를 찍은 후 채권을 팔려고 비행기에 올랐다가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 근처 산에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그녀 어머니를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녀의 전쟁 채권 홍보를 독려하던 게이블은 현장으로 날아가 그녀의 사랑하는 아내가 불타는 비행기에 의해 산불이 점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 정부는 조종사의 실수를 인정하였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2차 세계 대전으로 입은 첫 번째 여성 사상자라며 캐럴을 애도했습니다. 

 

 

캐럴의 죽음 이후 고통을 참을 수 없던 게이블은 조앤에게 먼저 전화해 밤을 보내며 술을 마시고 슬픔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게이블은 캐럴을 잊지 못해 군에 입대하였고 2차 세계 대전 중에 5번의 전투에 참전하면서 국가적 영웅으로 추대받았습니다. 군생활 중에도 하루에도 여러 번의 샤워를 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사용하는 욕조 사용을 꺼려해서 샤워기를 설치했을 정도로 결벽이 심한 편이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여배우들은 그와 키스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다고 합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치주염을 앓아서 죽다 살아난 경험도 있는데요. 틀니 때문에 입냄새가 엄청 심했다고 합니다. 청결에 민감한 하워드 휴즈가 머리는 안 감았던 것처럼 클라크는 입안 청결은 소홀했던 모양입니다.

 

 

 캐롤을 잊지 못하는 삶

 

어쨌거나 클라크 게이블은 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영화 어드벤처를 찍었지만 흥행과 평론 모두 참패하였습니다. 그의 개인적인 비극 이외에도 전성기가 한풀 꺾인 터라 젊음도 매력도 의욕도 잃은 상태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하던 일을 계속하긴 했습니다. 영화도 계속 찍었고 여자도 계속 만났습니다.

 

캐럴이 떠난 지 7년 후인 1949년에는 영국 배우 실비아 애슐리와 결혼하였는데요. 그의 결혼 중 가장 이상한 결혼에  속했습니다. 게이블은 아이를 원했지만 실비아는 아이를 낳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캐럴과 함께 살던 목장에서 살며 그녀를 잊지 못하는 클라크를 보며 실비아가 캐럴의 흔적을 지우려다 결혼 3년 만에 이혼당하였습니다. 그중에 1년은 별거 중이었고요. 사치를 일삼고 자신만의 하녀를 두고 파티를 일삼는 그녀를 심신이 피폐한 클라크가 좋아할 이 없었겠죠.

 

 

 

그리고 그의 마지막 결혼은 1955년 전 남편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이 있는 케이 윌리엄스와 하였는데요. 그녀는 누가봐도 캐럴 롬바드와 닮은 외모였다고 합니다. 클라크는 혈관 질환과 심장 질환을 오랫동안 앓아왔는데 1960년 병원에 입원하였고 11월 16일 동맥 혈전으로 사망한 것을 그의 두 양아들이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넉 달 후 케이는 유복자 존 클라크 게이블을 낳았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원하던 자식도 못 보고 죽었네요. 

 

평소 자신의 묘비에 운이 좋았던 사람이라고 쓰일 것이라고 예측했었던 그에게 전세계 신문들은 그가 죽은 날 모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더 킹 이즈 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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