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미남 배우로 이견이 없는 로버트 테일러는 할리우드 골든 에이지 시대의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배우 중 한 명입니다. 특히 잘생긴 외모로 유명했고 신뢰와 품격 있는 배우란 명성을 얻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미남이라는 찬사와 함께 완벽한 옆모습을 가진 남자로도 알려졌는데요. 배우로서의 업적도 상당했음에도 이렇다 할 수상은 하지 못하고 상당히 이른 나이에 사망하여 더욱 아쉬움이 남는 배우입니다.
세기 최고의 미남배우 로버트 테일러 이야기
1911년 8월 5일 미국 네브래스카주 게이지 타운에 있는 작은 마을 필리에서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외동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이 엄마 루스 아델리아 스탠호프는 스코틀랜드와 영국 혈통의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성으로 아이에게 가상의 영웅 이름인 알링턴이란 이름으로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아들의 아버지 스팽글러 앤드류 브루그의 직업은 농부, 구체적로는 곡물을 취급하는 양곡업자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5살 무렵에 아내가 심장 질환의 불치병을 앓게 되고 서른을 못 넘길거라고 하자 자신이 직접 의학을 공부하겠다며 서른 살에 미주리에 있는 의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아내의 병을 낫게 했다고 합니다. 아내 사랑이 대단한 분 같은데요. 그의 아버지는 정확하게 의사라기보다는 정골의학을 공부한 접골사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이고요. 또한, 한국의 단순 접골 치료와는 다른 보다 전문적인 분야를 공부한 것 같습니다.
수줍음이 많던 로버트 테일러
아내의 병이 나아 한시름 놓자마자 아들에게도 신체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어린 아들은 또래보다 말이 느린 것을 넘어 말을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하고 더듬는 장애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다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네브래스카의 베아트리체로 이주하였고 보다 넓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수줍음을 벗고 말 더듬는 결점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건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다 해주고 싶었던 것인지 로버트 테일러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예체능을 습득하게 됩니다.
조랑말을 타고 개인 첼로 수업을 받으며 육상과 웅변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그는 의학 공부에 못내 아쉬움이 있는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어 의대에 진학하게 됩니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성적이 형편없었고, 2학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고 잘하는 것은 첼로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멘토인 첼로 교수가 있는 학교로 편입하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미남
그러나 완벽한 미남에게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이 결정되기도 하는가 봅니다. 대학 연극 서클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왔고 그러한 가운데 졸업도 하기 전에 대형 스튜디오 MGM과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리고 계약서에는 담당자가 그의 어려운 이름 대신 로버트 테일러라는 예명을 쓰게 됩니다.
배우로서 성공한 삶을 보기도 전에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장례식이 끝난 후 로버트는 배우로 성공하는 삶보다 네브래스카에서 뭘 해도 편안하게 살 수 있다며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해 11월 그의 엄마가 아들을 설득하여 그는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엄마가 아니었으면 그는 평생 얼굴에 석유를 묻히고 살 뻔했네요.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간 그의 초기작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점차 그의 출중한 외모가 소문이 나면서 엄청난 펜레터가 쏟아지게 됩니다.
루돌프 발렌티노를 능가하는 매력
로버트 테일러가 등장하기 몇 년 전 최초의 미남이라고 불린 루돌프 발렌티노의 이른 죽음에 여전한 아쉬움이 있던 대중은 그보다 더 뛰어나고 빼어난 역대급 미모에 기존 배우들 저리가라며 폭발적으로 열광하였습니다.
180cm의 키에 품격 있는 미남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웨이브진 헤어에 갈매기 눈썹 오뚝한 코 그리고 회색빛이 감도는 푸른 눈에 희고 고른 치아 등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닌 그의 생긴 그대로를 설명한 외모입니다.
아직까지 그를 대표하는 특별한 작품이 없었음에도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로버트 테일러의 잘생긴 외모만으로 루돌프 발렌티노를 대체하고 뛰어넘은 최고의 아이돌 스타로 등극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6년 시대를 대표한 최고의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영화 춘희를 찍게 되면서 확실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 해에 최고 인기 있던 스타 클라크 게이블을 제치고 인기투표 1위를 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로버트 테일러의 결혼과 커리어
한편, 그의 소속사는 물 들어온 김에 노 젓자며 그를 한층 더 띄워줄 만한 작품에 출연시키게 되고 역시 당대 최고 스타 헤디 라마르와 머나 로이 등과 주연을 맡으며 정점을 찍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어쩌면 짧은 연애 혹은 남모를 동거로 평생 잘 지냈을지도 모르는 바바라 스탠윅과의 교제가 포착되면서 진퇴양난에 빠지게 됩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연애하면 결혼으로 이어지는 분위기인 데다 전무후무한 커리어의 국민 여배우 바바라 스탠윅과 스캔들이 났으니 소속사는 서둘러 결혼을 시키게 됩니다. 물론 서로 싫지 않았고 바바라 스탠윅은 그를 진심으로 좋아한 것도 있었겠지만요. 엄밀히 따지면 중매결혼과 다름없는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헤디 라마르와 영화를 찍다 말고 1939년 5월 13일에 결혼 서약을 하기 위해 촬영장을 잠시 비우게 됩니다. 그의 4살 연상인 아내는 코미디언 프랭크 페이와 1935년 이혼했으며 둘 사이에는 입양한 7살 된 아들이 있었습니다. 소속사의 의도가 통했던 것인지 로버트 테일러는 결혼 후 인기가 더욱 수직상승하게 됩니다.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
1940년에는 비비안 리와 함께 작업한 영화 애수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하루에 7000통이 넘는 팬레터를 받았다고 합니다. 뜨는 해와 지는 해의 콜라보가 통했던 걸까요? 둘의 결혼은 12년간 유지되긴 했지만 로버트는 왠지 겉도는 경향이 있어 보였습니다.
로버트와 바바라는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았고 친구로 지내기는 손색이 없었으나 이 둘의 관계는 소속사에 의해 결정된 쇼윈도 부부와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는 12년이나 지속되었으나 바바라가 로버트를 사랑하는 만큼 로버트는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향 자체가 워낙 상남자 기질이 넘쳐 비행기를 취미로 타고 운동과 사냥 그리고 낚시도 워낙 좋아했던 걸로 아는데요. 애국심도 남달라서 1942년에는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클라크 게이블처엄 자원 입대하여 3년간 해군으로 국가의 의무를 다하게 됩니다.
품격 있는 남자
비록 짧은 무명시절이었지만 스튜디오와 계약하기 전 시절부터 그의 평판은 남달랐습니다. 항상 시간에 맞춰 도착했고 매사 성실하게 최선을 다했는데요. 외모만 믿고 안일하게 행동하는 다른 배우들과는 확실히 격이 달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상당히 액티비티 한 성향으로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전형적인 상남자였던 것 같습니다. 제대 후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서 바쁜 촬영 일정 속에도 모형 자동차 수집에 스키트 사격은 물론 기존에 즐기던 사냥과 낚시 그리고 취미로 여섯 대의 여객기도 구입한 그는 진정 취미 덕후였습니다.
잘생긴 외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바람을 덜 핀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집착쩌는 바바라 스탠윅과는 관계가 더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1952년 둘은 이혼하게 됩니다. 물론 둘의 이혼 사유가 로버트의 과한 취미 생활 때문은 아니었고 표면적으로는 함께 작업한 여배우와의 불륜이 바바라를 자극하게 된 계기가 되긴 했지만요. 어쨌거나 바바라는 그런 것을 빌미 삼았던 것인지 이혼 후 로버트 테일러가 죽을 때까지 그의 수입 중 15%를 받기로 합의를 보았습니다.
로버트 테일러의 재혼과 죽음
그리고 로버트테일러는 1954년 독일 출신 여배우 우르술라 티스와 재혼합니다. 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고 우르슬라의 재혼 전 낳은 두 아이를 포함한 네 아이와 함께 조용하고 목장이 있는 전원주택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말이 조용한 목장이지 축구장 300개가 넘는 엄청나게 넓은 곳이었답니다.
그러나 이 둘의 행복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평생 흡연을 즐긴 그는 1968년 폐에 이상이 있음을 진단받았고 수술을 했음에도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특별한 고통은 없었지만 그는 급격하게 살이 빠졌고 허약해졌으며 결국 1969년 6월 8일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세기의 미남 치고 상습적인 바람둥이도 아니었고 매사 반듯하고 예의가 바르기로 유명했는데요. 미국의 매카시즘 열풍에 가장 적극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의심되는 자들을 신고하기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좌파가 많은 미국 영화계에 미운털이 박혔던 것인지 그의 실력이나 운발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히트한 영화가 많았음에도 트로피를 한 개도 받지 못한 스타이기도 합니다.
그의 죽음에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성향이 비슷한 로널드 레이건은 당시 배우에서 정치인의 길을 가며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하고 있었는데요. 로버트테일러의 추도사를 맡으면서 여러 번이나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쓰러지고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평으로 잘생긴 얼굴 덕에 쉽게 스타덤에 올랐지만 얼굴 때문에 연기에 한계가 따른 것은 가장 큰 비극이라고 뉴욕 타임즈는 평가했고 로널드 레이건은 그는 잘생긴 외모는 그의 모든 면에서 걸림돌이었다며 그는 프로페셔널한 진정한 배우였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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