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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제임스 스튜어트는 헐리우드 원조 엄친아이며 사랑스러운 완벽주의자

by winter-art 2023. 10. 15.

선량한 이미지로 근검과 정직 그리고 청교도적인 세계관으로 미국의 정신을 대표한, 미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배우 제임스 스튜어트에 관한 스토리입니다. 그는 최고의 스타였지만 화려함을 싫어하였고 친근한 이웃집 신사 아저씨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시대를 초월하여 미국인의 사랑을 받은 배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난 제임스 스튜어트 유년기

 

 

제임스 스튜어트는 1908년 5월 20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인디애나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스튜어트 가족은 반세기 동안  번창한 철물점을 소유하고 경영했고, 그의 아버지는 스페인-미국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 모두 참전한 용사였습니다. 또한 그의 어머니는 유명한 피아니스트였습니다.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 속에서 제임스와 그의 두 여동생은 부모에게  책임감, 신중함, 그리고 검소함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그는 여가 시간에는 각종 문화예술에 심취하여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며 지냈습니다. 사실 제임스는 엄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배우지 못했고 대신 아코디언 배우는 것은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아버지가 사내자식이 무슨 피아노를 배우냐며 완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라네요.

 

 

 

 

 

부유하고 반듯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한마디로 엄친아였습니다. 명문 사립 학교를 다니면서 평균보다 못한 성적을 받곤 하였는데요. 선생들이 말하길 그가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닌 창의적이고 몽상적인 기질 때문에 그랬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모 특히 아버지의 남다른 관심과 교육으로 그를 공부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고 엄친아답게 성장하였습니다.

 

 완벽한 학창시절과 건축학도가 된 이유

 

 

192센티미터의 큰키에 잘생긴 얼굴로 성장한 그는 스포츠도 좋아해서 풋볼 및 육상 선수로 활약한 데다 합창단에 성가대에 참여할 수 있는 클럽은 다 참여할 정도로 핵인싸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수줍음이 많아 방과 후에는 대부분 차고에서 시간을 보내며 모형 비행기를 만들거나 기계 공학 설계도를 그리며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파일럿이 되고 싶어했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습니다. 학창 시절 알바로 지방 건설회사에서 벽돌 운반을 나른 것이 전공 선택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요. 소위 막일을 하면서 건축을 전공할 생각을 한다는 것도 참 기특한 발상인 것 같습니다.

 

무엇을 해도 성실히 잘했겠지만 대학에서 그는 열정과 능력을 인정 받다못해 교수들이 그의 건축학 논문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장학금을 따로 수여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점점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고 대신 음악과 연극 등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는 1학년 때 학교 내 명성 높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트라이앵글 연극 클럽에 연기가 아닌 아코디언 연주 실력으로 가입하게 됩니다. 신입생은 가입할 수 없다는 조건을 뚫고서 말입니다. 

 

연기에 매료되다

 

이미 그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가 있었지만 학업도 소홀하지 않아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대학원 연구 장학금도 받고 다닐 수 있는 자격도 부여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학원 대신 케이프 코드에서 공연하는 일종의 연극 축제 시즌에 초대를 받았는데요. 이곳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브로드웨이에서 연극도 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기도 했고 무대 매니저로 취직도 하였지만 자주 큐 싸인을 놓쳐 해고당하였습니다. 이도저도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고 미국의 경제 상황도 안 좋으니 건축으로 취직할 곳도 없던 터에 아버지 가업을 물려받기는 싫고 다시 학업이나 이어갈까 생각하던 중에

 

 

 

영화배우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친구 헨리 폰다가 너도 연극 말고 영화로 건너오는 게 어때하면서 그에게 영화 데뷔를 권유하였고요. 이를 계기로 1935년 스물일곱살의 제임스는 스튜어트 MGM 스튜디오와 계약을 맺고 스펜서 트레이시 주연의 <보도의 살인>을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의 바르고 수줍음이 많던 제임스는 아직 영화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여 긴장한 모습이 스크린에 그대로 전달되어서인지 혹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찍는 영화마다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러한 가운데 그가 동경하던 여배우 진저 로저스를 만나 짧지만 꿈같은 연애 경험도 하게 됩니다.

 

이혼한 헨리 폰다와 룸메이트로 지내면서 그와 함께 헐리우드 최고의 플레이 보이 경력도 무르익어갈 무렵 2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지내고 있던 노마 시어러와 열애 소식이 들려오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고요. 같은 해인 1938년 영화 우리 집의 낙원이 대히트하면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 프랭크 카프라는 제임스 스튜어트더러 게리 쿠퍼와 클라크 게이블 배우를 잇는 역대 최고의 배우라며 흡족해했습니다. 다음 해 제임스는 카프라 감독의 정치 드라마 스미스 씨 워싱턴에 가다란 영화에서 순수한 소년 같은 캐릭터로 정점을 찍게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한 스타가 되었는데도 그의 부모는 그딴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연기보다는 고향에 돌아와 순수하게 살면서 가업을 잇길 원했다고 합니다. 

 

 

세계 대전에 참전

 

또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최초의 할리우드 톱 배우로서 애국심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1940년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후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그는 육군 이등병으로 자원 입대하였습니다. 그의 입대가 소속사 입장에서는 실망스러운 일이었겠지만 제임스 스튜어트는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았습니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남북전쟁에서 장군이었고 그의 아버지 알렉스는 스페인 미국 전과 제1차 세계대전 모두 참전한 용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입대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공군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전투 조종사가 되기에 33살의 그는 나이가 많았고 최소 기준 몸무게인 64킬로그램을 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300시간의 비행을 채우고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으며 약 5킬로가량 살도 찌웠습니다. 그렇게 공군에 합격했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 지원을 한 첫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제8공군 제2전투비행단에 배치되어 작전 장교, 참모총장, 비행 중대장을 차례로 맡았습니다. 그의 스타성을 이용해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한 홍보 영상에 출연하여 순식간에 15만 명을 모집하는 데 기여도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 상공에서 20회의 폭격 임무를 지휘하여 브레멘, 프랑크푸르트 및 베를린의 목표물을 타격했습니다. 배우가 아닌 군인으로 맹위를 떨친 그는 훈장을 두 개나 받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그는 대령으로 소집되었지만 공군 예비군에 남았고 1959년 그는 준장으로 진급하였고 1968년 예비군에서 은퇴하기까지 미군에서 가장 높은 계급의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절친이기도 했던 레이건 대통령은 그에게 미국의 민간인에게 수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상인 자유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1945년 말 전쟁에서 돌아온 스튜어트 씨는 자신의 군사적 공적을 알리지 말 것을 고집했지만 그는 자신의 고향은 물론 미국의 전쟁 영웅으로 추앙 받았습니다.  또한,  배우이자 군인이기도 했던 제임스 스튜어트는 제대 후 스튜디오 계약대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더 높은 연봉을 받고 영화 수익의 절반까지 받으며 퍼센티지 계약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제대 후 제2의 전성기

 

 그의 복귀작은 1946년에 개봉한 멋진 인생입니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이 영화는 나홀로 집에 가 개봉하기 전까지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크리스마스 휴일 영화가 되었으며 제임스 본인도 가장 애착을 갖는 영화라고 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연기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1948년에는 알프레드 히치콕과 함께 영화 로프를 시작으로 이창, 나는 비밀을 안다, 현기증 등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습니다. 스릴러 장르의 고전으로 불리는 현기증은 현재 시민케인 다음으로 인정받는 영화이지만 당시에는 흥행도 참패하고 상대 여주인공 킴 노박과 너무 많이 나이차가 나는 바람에 대중에게 혹평을 넘어 호통을 들을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그도 이 영화 이후로는 젊은 배우에게 양보하기로 하고 더는 로맨스 영화는 출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중년이 되어도 노년이 되어도 지미란 애칭의 제임스는 대중의 넘치는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았습니다.

 

가장 인기있는 스타로 등극

 

 

1955년 제임스 스튜어트는 박스 오피스에서 최고로 인기 있는 남성이었고 존 웨인을 이어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A리스트 스타로 추앙받게 됩니다. 한번도 연기 수업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는 독특한 연기 스타일을 두고 그는 자신은 연기하지 않고 반응한다면서 자신을 노력하는 어눌한 남자로 묘사했습니다. 또한 연기 기술을 공부하는 것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며 일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제임스 스튜어트는 마흔한 살까지 독신으로 즐기고 있었는데요. 1948년 게리 쿠퍼가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글로리아 헤트릭 맥클레인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서른한 살의 그녀는 이혼한 경력이 있고 이미 다섯 살 그리고 세 살 된 아들이 있었지만 이미 사랑에 빠져버린 그에게 그런 것은 전혀 고려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밝고 동물을 사랑했으며 모델 출신이긴 하지만 까탈스러운 배우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글로리아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완벽한 남자를 마다할리 없었고 1949년 8월 9일에 결혼하였고 제임스는 로널드와 마이클을 친자식처럼 여겼으며 둘 사이에는 1951년에 태어난 쌍둥이 딸 켈리와 주디를 낳았고 성실하게 가정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69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중인 장남 로널드 맥린 중위를 잃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제임스는 198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였는데요. 그는 여태껏 받아본 상 중 가장 훌륭한 상이라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자신이 잊히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수상 소감 후 참석한 수백 명의 영화인들이 10분이 넘게 기립박수를 쳐서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끝났을 정도였습니다. 

 

 

이성과 감성을 소유한

 

 

그는 평소 시쓰는 것이 취미여서 시집까지 출간했는데요 그의 시집은 현재까지도 잘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낭만적인 기질과는 별도로 할리우드에서 가장 명민한 사업가 중 한 명이기도 해서 부동산을 비롯한 다양한 투자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그는 항상 검소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제임스는 1994년 아내 글로리아가 폐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평생을 해로하였고 아내가 사망한 후 전의를 상실하여 배우 생활을 은퇴하였습니다. 그리고 3년 후 제임스 스튜어트는 89세에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에 관한 평판

 

그에 관해 조앤 크로포드는 제임스 스튜어트는 무서운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랑스러운 완벽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버트 레이놀즈는 제임스 스튜어트에 대한 칭찬을 마르지 않게 해왔는데요.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본 지미는 항상 너무 겸손하고 멋진 남자라면서 배우 이상으로 모든 남자가 되고 싶어 할 그런 남자라고 극찬했습니다.

 

 

 

제임스 스튜어트는 우파적 신념을 지닌 강경한 공화당원으로도 유명했는데요. 평생 가장 친했던 친구 헨리 폰다하고는 데뷔 전부터 친한 절친이지만 정치색이 달라서 치고 받는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고 이후로 서로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며 화해하고 다시 좋은 친구로 남았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헐리우드에서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이들을 몰아내는 일에도 일조한 적이 있는데요. 공산주의자들이 불안의 상당한 원인 즉 선동으로 불안을 조성하는 것을 우려하며 쇼 비즈니스계에서 잠재적 위험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강경한 보수성향이었지만 워낙 타의 모범이 되니 까일 일이 없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민주당 소속의 트루먼 대통령도 그의 열혈팬이어서 만약 자신에게 아들이 있었으면 딱 지미 스튜어트 같은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클린턴 대통령도 제임스 스튜어트 사망 후  미국은 오늘 국보를 잃었다며 지미 스튜어트는 훌륭한 배우이자 신사이며 애국자였다고 애도했습니다.

 

살아생전 자신에 관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 남다른 애국심 그리고 가족의 화목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 그 힘을 굳게 믿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던  그는 실제로 누구보다 근면 성실하게 살았고 예술가로서뿐만 아니라 남다른 애국심으로 모든 면에서 귀감이 되는 배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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