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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60년대 프랑스를 대표한 최고 여배우 잔느모로

by winter-art 2023. 10. 19.

프랑스를 대표하는 섹시함의 대명사 잔느 모로는 1960년대 뛰어난 연기와 세련된 태도로 대중의 큰 사랑을 받은 스타입니다.

잔느모로는 뾰루지가 난 피부에 겁을 먹은 것 같은 큰 눈 그리고 눈 밑은 피곤해 보일 정도로 두툼한 아이백에 그늘이 지고 있었고 양끝이 처진 입술을 하고 다소 나른한 음성으로 시크한 프렌치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누벨바그의 여신 잔느 모로

 

 

 

잔느모로의  화장기 없는 얼굴 만으로도 영화계에 새로운 물결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여태 그런 모습으로 나온 배우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는 1958년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가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마성의 여우라고 불렸고 1961년의 영화 연인들에 이어 두 남자와 한 여자와의 독특한 사랑을 다룬, 지금봐도 감각적인 영화 프랑수아 트뤼포의 쥘 엔 짐 이후 그녀는 누벨바그의 여신이 되었습니다.

 

 

 

 팜므파탈이면서 패션 아이콘

 

 

실제로 그녀의 삶도 루이스 브뉘엘, 오손웰즈, 토니 리처드슨이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와 같은 당대 최고 감독들과의 작업과 염문을 오가며 애간장을 태운 여배우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특히 쥘앤짐 영화 속 그녀의 복장은 단출했음에도 최고의 스타일 아이콘으로 사랑 받았고요. 현재까지도 많은 패션 화보 등에서 이 영화속 이미지를 참고하여 포즈 등을 취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잔느 모로의 출생 배경

 

 

 

잔느 모로는 1928년 1월 23일 파리에서 프랑스의 술집 주인이자 식당 지배인인 아나톨 모로와 폴리 베르제레에서 틸러 걸스와 춤을 추러 온 랭커셔 출신의 영국 무용수 캐서린 버클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 아버지는 농부의 후손이었고 잔느가 태어난 지 1년 후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사하여 작은 호텔과 식당을 열었습니다.

 

 

 

 

잔느는 엄격한 가톨릭 학교에 다녔지만 자전거에서 떨어지고 나무를 오르는 등의 말괄량이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많이 마셨고 영어 말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남편 쪽 가족은 아나톨이 댄서와 결혼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캐서린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캐서린은 잔과 그녀의 여동생을 데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선포되자 남편과 함께 있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뉴웨이브 스타로 등극

 

 

 

하지만 전쟁 동안, 잔의 부모는 헤어졌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프랑스 남부에 머물렀던 동안, 그녀의 어머니는 적 외국인으로서 게슈타포에 매일 등록하기 위해 파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위안소 위의 아파트에 살았습니다. 그녀는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긴 줄의 군인들을 지나 서둘러 지나치곤 했습니다. 엄혹한 시절 속에 잔느는 책의 세계로 빠져 지냈습니다.

 

그녀는 13살 때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의 책을 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는 15세 때 라틴어 수업을 빼먹고 장 아누일의 안티고네 공연을 보러 갔다가 엄청난 감동을 받고 배우가 되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녀는 파리 콘서바토리에 다녔고 프랑스의 유일한 국립극장인 코미디 프랑세즈 소속 배우가 되었습니다.

 

 

 

 

업계에선 그녀를 이전 세대 최고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의 현신이라고 극찬하며 인정하였고 그녀의 엄마도 그녀가 배우로 활동하는 것을 응원했지만 보수적인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연극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의 뺨을 때릴 정도로 극심한 반대를 했습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잔느모로는 약 3년 동안 그곳에서 일하고 1949년 배우 장 루이 리샤르와 결혼하여 같은 해에 아들 제롬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잔느모로는 한달 만에 신생아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복귀하였고 부부 사이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1951년에 헤어졌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탄탄하게 경력을 쌓은 그녀는 1950년대 빠르게 프랑스 주류 영화계에서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프랑스의 새로운 물결 누벨바그의 선구자로 불린 장 루이 말을 만난 뒤부터 잔느모로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감독은 잔느모로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강조하였고,

그녀의 눈밑 그늘과 비대칭적인 얼굴 등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부각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뭐랄까 이전까지 얼굴보다 육체에 환장하게 만든 트렌드를 얼굴로 옮겨왔다고나 할까요? 그러면서 프랑스 스타일의 뉴 웨이브는 얼굴을 클로즈업하고 비를 종일 맞으며 밤거리를 걷는 여성의 인상적인 모습을 연출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런 일련의 장치와 연출 등으로 인해 그녀는 뉴웨이브 스타로 거듭났습니다.

 

잔느 모로의 사생활과 죽음

 

 

 

1977년에는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과 결혼했지만 1980년에 또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와 10년 동안 20편 이상의 작품을 찍으며서 동료로 잘 지내긴 했습니다. 잔느모로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기를 했다고 하였는데 그러면서 남성에 대한 불신도 가중된 게 아닌가 합니다.

 

 

 

인생에 관한 그녀의 관점을 두고 인생은 산이고 당신은 올라가서 내려오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몸이 불타도록 열심히 삶이라는 산에 올랐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페미니스트의 아이콘이기도 한 그녀는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선언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2017년 7월 31일 89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사망한 그녀 죽음을 두고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영화계 전설의 한 부분이 사라졌다며

그녀는 영화 그 자체로 항상 확립된 질서에 반항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며 그녀 죽음에 경의를 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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