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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고전배우 진 티어니의 우울의 원인과 라이프 스토리

by winter-art 2023. 7. 10.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 아가사크리스티의 소설에도 인용되었던 비극적인 삶의 주인공 진 티어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40년대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미인으로도 유명했지만 그와 더불어 그녀의 불행한 일생이 더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진 티어니의 독특한 생김새

 

 

어떤이는 진 티어니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으로 꼽기도 했지만요. 조금 오래 봐야 예뻐 보이는 독특한 미인에 속하는 편입니다. 현대 배우 중 캐서린 제타존스가 진 티어니와 상당히 닮은 모습이지만 솔직히 캐서린 제타존스가 더 예뻐 보입니다. 당시 미국에서도 그녀의 외모에 관해서는 호불호가 강했습니다. 그래서 데뷔 초에는 이국적인 생김새로 인해 인디언부터 중국인까지 다양한 국적의 역할을 도맡아 했는데요. 그들 기준으로 이국적인 생김새는 다소 동양적인 마스크로 본 모양입니다. 그리고 서양인은 높은 광대를 좋아한다고는 하는데요. 진 티어니의 광대는 높기만 한 것이 아닌 동양인처럼 다소 넙데데한 편이라서 특이하게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청록색의 눈동자와 갈색머리 그리고 그녀의 독특한 얼굴형으로 인해 보면 볼수록 그녀에게 빠져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진 티어니의 출생과 배우 데뷔

 

진 티어니는 1920년 11월 19일 뉴욕 부룩클린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혈통의 보험 중개인이었고 엄마는 중학교 체육 선생이었습니다. 진 티어니는 토네티컷 주 웨스트포트에서 자라 그 지역의 사립학교를 다녔고 어릴 적부터 예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였는데요. 그녀의 부모는 아이가 지적인 여성으로 자라길 원했고 교육에 남다른 힘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최고의 사립학교에 다니며 스위스의 국제학교에서 공부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가며 공부하였습니다. 

 

 

여느 상류층 자제들이 그랬듯이 그녀도 사교계 데뷔를 앞두고 부모를 따라 워너 브라더스 스튜디오 구경을 하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유명한 감독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배우가 될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부모는 출연료가 너무 작다는 핑계로 거절하였고 배우보다는 좋은 집안에 결혼해서 성공적인 가정생활을 할 것을 원했습니다. 

 

 

 

진 티어니는 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에 사교계에 진출하였고 많은 남자들이 그녀에게 구혼하였지만 그녀는 배우가 되길 원했습니다. 한마디로 바람이 잔뜩 들어간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의 허락을 구한 대신에 아버지는 영화보다 연극을 먼저 하길 원해서 연극 배우로 먼저 활동하였습니다. 지역 비평가들의 긍정적인 평가 속에서 진 티어니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본 아버지는 그녀의 꿈을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딸을 위해 회사까지 설립 그리고 첫 번째 결혼

얼마나 집이 부자이고 딸을 아끼면 그러는 줄 몰라도 진 티어니 아버지는 그녀가 진정한 배우가 되길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녀를 위해 회사까지 설립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경멸에 가까울 정도로 반대하더니 회사까지 차려준 찐 부자 찐 사랑 아버지의 은혜 망극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할리우드 입성이 처음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감은 시원치 않은 와중에 역시나 미인 앞에서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하워드 휴즈가 나타납니다. 하지만 상류층 남자들의 속성을 너무 잘 아는 진 티어니는 그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대신 둘은 평생 좋은 친구로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할리우드 입성이 녹록지 않자 그녀는 다시 브로드웨이의 연극무대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가장 성공한 스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헐리우드의 러브콜을 수락하여 폭스와 계약하게 됩니다. 작은 배역을 시작으로 1941년에야 그녀의 매력을 세상에 점점 더 알리게 되었고 의상 디자이너인 카시니와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둘은 6월 1일 몰래 결혼을 했고 뒤늦게 사실을 안 부모는 보잘것없는 그와 결혼한 것을 알고 엄청나게 광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진 티어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편과 행복한 몇 년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위해 회사까지 설립 그리고 첫 번째 결혼

 

결혼 후에도 진은 배우 활동을 활발히 하였고요. 1943년에는 루비치 감독에게 폭군이라며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는 했지만 그의 영화로 인해 그녀의 명성은 더 높아졌습니다. 그녀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진의 정신은 더 피폐해졌습니다. 무엇보다 결혼을 반대했던 부모는 남편 카시니를 가족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그녀 수입의 25%를 청구할정도로 소송까지 벌였습니다. 일은 밀려오고 배는 불러서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죠.

 

게다가 전쟁통이라 배우들이 위문공연을 많이 다녔는데요. 진도 애국심이 넘쳐서 국채를 사는 국민들에게 뺨에 키스해주는 이벤트를 벌이며 국익을 위해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 중에 풍진에 걸렸고요. 그것이 태어난 아기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것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딸 다리아는 1.4킬로그램의 조산아로 태어난 데다 부분 실명에 청각 장애까지 가진 데다 정신 장애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태어난 원인은 임신 중 풍진에 걸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진 티어니의 역작 로라 그리고 열성팬

 

 

진 티어니는 아픈 딸을 낳은 후에도 배우 생활에 전념하였고 출산 1년 후인 1944년에는 그녀의 인생 역작 로라를 맡아 최고의 찬사를 받습니다. 한국에는 안 알려졌지만 진 티어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출연한 영화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의 배우로서의 성공이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당대 리타 헤이워스와 에바 가드너와 함께 당시 가장 아름답고 인기 있는 배우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진 티어니는 아픈 딸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지만 그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진의 절친 하워드 휴즈가 아픈 다리아의 치료비를 지불하겠다고 하였고 진은 하워드의 그러한 선행을 절대 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건 그렇고 여러모로 피곤한 상황 속에서 진 티어니는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해져 다른 남자와 만나 외도까지 하게 되는데요. 그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딸 다리아가 태어난 지 2년 후 어떤 열성팬이 진 티어니를 찾아와 인사하였습니다. 진 티어니도 처음에는 그녀를 반겼지만 이내 싸늘해진 표정으로 팬 곁을 떠나게 되는데요. 알고 보니 이 열성팬이 풍진에 걸려 격리 중에 있었음에도 진 티어니를 보고 싶은 마음에 몰래나와 그녀 빰에 키스하고 갔다고 실토한 거였습니다. 이 열성팬의 이기적인 팬심으로 자신이 풍진에 걸려 아픈 딸을 낳았다는 생각을 하니 피꺼솟 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누구나 경악을 금치 못할 이 에피소드를 아가사크리스티가 소설 깨어진 거울에 그대로 담아냈다고 합니다. 

 

진 티어니의 역작 로라 그리고 열성팬

 

진 티어니는 남편과도 이혼 수순을 밟고 있었고 1946년에 헤어진 후 존에프 케네디와도 짧은 연애를 하였습니다. 정치적 야망이 있는 그는 진 티어니와는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고 그렇게 둘은 헤어졌지만 몇 년 후 존에프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축하 편지는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은 했지만 중간에 또 만났는지 둘째 크리스티나를 낳았고 친구로 지내던 둘 사이는 1948년 영원히 끝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진 티어니는 첫 남편 빼고는 후덜덜한 집안 남자들하고만 엮이게 되는데요. 1950년대 초 리타 헤이워스와 결혼하고 이혼 중이던 난봉꾼 알리칸 왕자와 사귄 것입니다. 그러나 알리칸 집안에서 또 할리우드 배우와 결혼하는 것은 결사반대해서 둘은 약혼은 깨지고 말았습니다. 천만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그녀의 깊은 우울증

 

 

 

진 티어니는 아픈 딸은 하워드 휴즈에게 맡기고 열심히 일만하고 연애만 하였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1950년대 그녀의 명성이 쇠퇴할 무렵 그녀의 정신에도 문제가 생기고 맙니다. 바람 잘날 없는 배우 생활에 아픈 아이 그리고 복잡한 남자관계부터 부모와의 트러블 등 미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겠죠. 당시 험프리보가트와 함께 영화를 찍는 도중 그는 진 티어니의 정신적 문제를 고자질하고 진 티어니 자신도 알고 있다는 듯 정신과 치료에 집중합니다. 국내의 여에스더 박사도 우울증 치료를 위해 경련치료를 받았다고 하였는데요. 진 티어니는 시설에서 여에스더보다 몇 배나 더 혹독한 치료를 받아 탈출하다 몇 번이나 잡혔다고 합니다.  그녀는 전기충격 요법을 자그마치 27번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훗날 이 시간을 가장 굴욕적인 시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1957년에는 14층 높이의 아파트 절벽에서 자살 소동을 벌인 적도 있는데요. 이후 그녀는 기관으로 보내졌고 우울증으로 인해 더 많은 치료를 받았습니다. 1년 후 그녀는 완치하여 퇴원하였고 석유 재벌 하워드 리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워드 리는 헤디 라마르의 다섯번째 남편이었을 겁니다. 둘은 1960년 7월에 결혼하였고 1981년 리가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습니다.

 

 은둔과 몰락

1960년대 진 티어니는 배우가 아닌 조용한 평민 생활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의상실 판매 보조원일을 왜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적함을 달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알아본 손님이 제보하였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진 티어니는 다시 배우 생활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잠깐 활발하게 일을 하였고 극찬도 받았지만 1964년 이만하면 됐다면서 은퇴 선언을 하였습니다.

1979년에는 자신의 허심탄회한 자서전을 썼고 책 내용에는 자신의 경력과 정신병력에 관해 자세하게 적어 대중은 그녀의 솔직함에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진 티어니는 1991년 11월 71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폐기종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더 나은 연기를 위해 목소리를 걸걸하게 만들려고 젊은 시절부터 담배를 열심히 피운 대가였습니다.

 

 

https://youtu.be/zY-dZ_q74j4

 

 

https://youtu.be/MKS-Kujbo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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