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끌어들여 한반도 경쟁에 648년 나당동맹,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이 한반도 먹으려고 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맞서 나당전쟁 3~4년을 치름. 어쨌든 대동강 이남의 다소 불완전한 삼한일통일을 하게 됨. 이후 935년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이 종묘사직 유지가 어렵게 되자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갖다 바침. 그렇게 260년 정도의 시간이 통일 신라. 후기 신라라고 함.
신라사 시대 구분
신라사는 무려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기에 시대 구분을 해야 함. 김부식 삼국사기의 시대 구분과 일연의 삼국유사 시대 구분 방법이 있다. 일연(승려)의 시대 구분은 6세기 초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국가 공인을 받던 시기를 중요하게 여김. 불교 공인 이전을 상고라고 하고 법흥왕 때 불교 공인이 된 시점부터 법흥왕 다음 진흥왕, 진지왕, 그리고 진지왕이 화백회의 쫓겨나고 진흥왕 큰 아들 동륜의 장자 진평이 왕이 됨. 근 오십 년 가까이...
삼국유사식 시대 구별
진평왕은 아들이 없어서 덕만 공주가 뒤를 잇는데 그가 선덕여왕, 이후 사촌 승만 공주가 왕이 되는데 바로 진덕여왕임. 이렇게 여섯명의 왕이 붙은 시기를 중고라고 하고 진이 붙는 사람들은 신라 왕실 스스로가 석가종(현생한 석가종)으로 불림. 법흥왕은 불법이 흥해라는 뜻. 진덕, 선덕도 불교에서 쓰는 이름임. 위 여섯 명을 불교식 왕명 시대라고 함. 이후 태종 무열왕 때부터 신라 멸망할 때까지를 하고라고 함.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식 구별임.
정말 중요한 것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구별법. 그는 선덕여왕 진덕여왕까지 상대라고 함. 그런데 29대 태종 무열왕이 즉위한 것이 진흥왕의 장자는 동륜 태자, 금륜, 사륜이라고 하는 사람이 진지왕이 되었음. 진지왕은 평민 여자와 사귀다 화백회의에서 쫓겨남. 이후 진평왕이 됨. 진지왕의 아들이 용춘 바로 김춘추임. 그런데 진지왕은 성골, 그는 추정컨대 성골에서 진골에서 족강이 됨. 김춘추를 모든 역사 기록에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라고 묘사하고 있음. 사실 성공에서 진골로 쫓겨난 것.
다른 나라에는 여왕이 없는데 신라만 여왕이 있던 것은 신라가 골품제의 나라였기 때문. 남녀구별보다 골품의 구별이 더 상위에 있었음. 즉, 진평왕이 아들을 낳지 못한데다 성골 중에 왕이 없으니 여자임에도 진평왕 장녀 덕만공주가 왕이 된 것. 선덕 여왕도 후사가 없으니 사촌 승만 공주가 진덕 여왕이 된 것. 이 무렵이 되면 신주류가 형성이 되는데 김춘추와 김유신임.
김춘추 집권 이전을 상대 이후를 중대
김춘추는 당과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막후 실세로 부상하였고 가야계 무장 세력을 대표하는 김유신과 혼인 관계를 맺음. 김유신 둘째 부인 딸과 결혼한 김추누가 신라의 신주류가 됨. 당시 마지막 걸림돌이 상대등이던 비담이라고 추측. 비담의 난 진압 후 김춘추가 확실한 주류가 됨. 진덕여왕이 후사없이 죽으니까 화백회의에서 후사 결정. 처음에는 알천공이 물망에 올랐으나 사양하고 만장일치로 김춘추가 신라의 29대 군주가 된 것. 사실 알천이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임.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출신 군주이며 그는 혈통의 변화뿐 아니라 삼한 일통의 초석을 다짐. 그의 아들 문무왕이 삼한일통이란 대업을 이룸. 김부식은 그 이전을 상대 이후를 중대라고 하였음.
중대의 특징
중대의 특징은 삼한일통 이후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 중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왕권 강화, 즉 전제왕권 확립, 요즘말로 독재 왕권이며 이는 중대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봄.
또한, 정치사는 핵심이 군주. 중대의 군주를 보자면, 29대 무열왕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 출신 군주로 삼한일통의 초석을 닦은 사람. 그는 백제 멸망 바로 직후인 50대 초반에 죽음. 그의 아들 김범민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함.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를 격퇴시킴. 문무왕때는 이방부 설치, 외사정 두었다. 선덕왕 진덕왕 때까지 불교식으로 이름을 지었다가 문무와아 때부터 중국식 시호를 사용함. 그래서 태종 무열왕.
문무왕은 무력을 기반으로 삼한일통하던 것을 문민통치가 필요하다고 여겨 새로운 도성 건설 계획을 말하니 의상대사가 민심의 성을 쌓으라고 충고. 그것을 받아들여 문무왕이 문민통치로 넘어간다고 해서 문자가 들어간 것. 하지만 무열왕이나 문무왕은 시험에 잘 나오지 않음. 신문왕이 나옴. 신문왕의 재위 기간은 12년 밖에 되지 않지만 중대의 가장 큰 특징인 전제왕권을 확립한 사람이기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이유.
신라 하대 구분
중대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한 130년임. 혜공이 8살에 왕이 되었을 때 김대공이 난을 일으킴. 대공의 난을 계기로 3년 동안 96명의 최고 귀족들이 왕위 다툼에 관련됐다고 해서(96각각의 난) 혜공왕을 죽이고 선덕왕 김양상이 왕이 됨. 그는 내물계 10대 손임. 선덕왕이 되기 전까지 8명의 군주가 모두 무열집계. 김부식이 이걸 중대라고 함. 선덕왕 5년 뒤 죽고 김경신이 왕이 됨. 그는 내물 12 세손. 그 뒤로는 내물계가 왕을 차지. 무열계에서 내물계가 왕을 차지하는 것이 신라 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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