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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book/성경 자의적 해석

인간창조설 그리고 아담과 이브 창세기 2장 요약

by winter-art 2024. 1. 8.

창세기 2장 내용은 일곱째 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마무리한 후 만물에게 축복을 내리며 휴식을 취한 내용입니다. 그렇게 7일째 쉬고 전개상 상황을 좀 더 구체화한 내용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이브의 탄생 배경

 

 

창세기 1장 읽기

 

 

 

 

 

 

 먼지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

 

 

신비로운 상황 속에서 우리의 주하나님은 땅에서 먼지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여태 흙으로 사람을 만든 줄 알았는데 먼지로 사람을 만들었다네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콧구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생명체가 됩니다. 

 

 

 

에덴 동산이 아닌 에덴 정원

 

 

또한, 창세기 2장 8절에 나오는 에덴은 동쪽에 있는 에덴 정원이지 에덴동산이 아니었습니다. 에덴 정원에 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일종의 낙원 혹은 천국 같은 곳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에덴이란 말은 평원이란 의미의 아카드어에서 유래했다고 하니 동산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또한, 히브리어로는 천국이나 낙원이란 의미였다고 하니 분명 특별한 장소는 맞는 것 같고 언덕이 있는 동산보다는 평지의 정원에 가깝다고 유추해 봅니다. 

 

 

 

 

여러 정황들을 보아서 에덴은 하나님 소유이지만 하나님이 6일 동안 작업한 업무에는 해당하지 않는, 즉 본래부터 있던 고유의 장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쉽게 말하면 에덴 정원은 하나님 개인 소유의 서재 같은 곳이었던 거죠. 

 

 

 

 

혹은 어떤 미션을 주기 위해서 그곳을 알려 주었던 것이겠죠. SF적 사고를 하자면 다른 차원의 공간, 그곳이 하나님이 실재 머무는 공간이든 약간 연옥 같은 그런 곳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리적으로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터무니없지 않나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의 연구실이나 실험실 같은 곳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하나님은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시는 분인데 더군다나 에덴 정원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후에 나올 선악과가 있는 곳인 걸 보면 연구실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나무에 관하여

 

 창세기 2장 9절은 나무를 강조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먼저 창조주는 보기에도 먹기에도 좋은 나무들이 즐비한 정원 한가운데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있다고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를 두고 이 부분은 후에 편의상 붙여진 이름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떤 인간이 탄생했는지는  몰라도 집도 절도 주지 않고 발가벗은 채 정원에서만 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냥 아주 미개한, 하나님의 애완인 정도로 취급한 게 아닐까요? 

 

 

 

 

물론 에덴 정원은 아무 근심 걱정도 없고 몸에 좋은 열매 따 먹으며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낙원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그렇게 욕심없이 남녀 둘이서 사는 일이 과연 궁극의 행복인 걸까요? 인간이 희로애락을 알지 못하고 기쁘게 뛰어다닐 일만 있다면 그것이 사랑받는 개와 무엇이 다를까요? 물론 사랑받는 강아지는 충분히 행복해 보입니다. 개들은 생각할 필요도 걱정할 필요도 없이 평생 주인만 바라보고 주인 말만 잘 들으면 됩니다. 그렇기에 주인이 강아지를 돌봐주고 보람을 느끼는 거겠죠.

 

 

 

어쩌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떤 경각심, 공포심, 즉 성경에서 줄창 얘기하는 바로 그 원죄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설정을 해 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부로 하나님의 연구실에 아담을 발가벗고 살게 해 놓고 금기하는 나무 열매를 심어 놓고, 게다가 그전에는 살금살금 기어다니는 동물을 만들어 두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여하튼, 하나님은 에덴 정원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이곳에서부터 인류의 시작을 알린 겁니다. 

 

 

 인류의 발상지

 

 

에덴에서 뻗어 나온 강 중 첫 번째는 피숀입니다. 한국어로는 비손으로 알려져 있고 하빌라 지역을 흐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비손과 기혼강은 현존하지 않는 걸로 알려져 있고 그래서인지 강의 위치에 대한 억측이 많은 편입니다. 비손은 풍요를 상징하는 의미로 이 지역에는 특유의 향료와 오닉스 등의 진귀한 보석이 많이 나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이런 특산물을 근거로 갠지스 강이나 인더스 강으로 보는 이도 있고 아프리카 동북부 지역이라는 말도 있고요.

 

 

 의문의 연속

 

 에덴은 현재 지구상에 없는 지명이라고 하는데요. 그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의 추측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또한, 강이 네 줄기로 뻗어 나가는 것이 마치 문명이 발달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유프라테스 등의 강 유역이 바로 떠오르는데요.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할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세계의 시작점

 

 

최초의 인류는 서아시아에서 시작된 걸로 알고 있지만 성경 창세기만 봐도 방향은 동쪽을 지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해가 뜨는 곳이니까 시작도 그곳에서 비롯되었겠죠. 그러나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 발생했느냐가 의문으로 남는다는 겁니다. 

 

12절에 나오는 브델리움은 일종의 나무 수액에서 나온 검 같은 거로 알려져 있고 향유 같은 몰약의 일종으로 보이기도 하는데요. 나무의 수액이 응고될 때 마치 진주알처럼 보인다고 해서 진주의 일종으로 귀히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건 그렇고 중요한 것은 하발라 지역은 풍요를 상징하며 그렇기에 이 지역에는 진귀한 보석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특산물이 나는 곳의 정황으로 보아 인더스 강이었을 확률이 높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하빌라 지역은 현존하지 않고 대홍수 이후로 사라진 걸로 알려지고 있는데요. 아담이 탄생한 에덴 주변으로 이상적인 황금향 등이 있다가 이런 진귀한 것들은 인간 너희들에게는 가당치 않다 해서 없애버린 게 아니었을까요?

 

 

 

또한, 피숀강과 기혼강은 현존하지 않는 강으로 알려진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강이라기보다는 작은 개울 정도였을 거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고대 문명의 발상지에 핵심적인 물줄기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지금도 버젓이 흐르고 있습니다. 역사적 물리적으로 사람들에게 강은 강일뿐이지만 성령 충만한 신도 입장에서는 4개의 강이 각각 남다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피숀강에 이어 기혼강은 터짐, 폭발, 깊은 흐름 등을 의미합니다. 기혼강은 쿠시땅 혹은 구스온을 흐르는 강으로 나오는데 이집트의 남쪽에 있는 땅으로 수단과 에티오피아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입니다. 일부는 기혼강이 나일강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일강의 발원지가 다르다고 부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인류로 보면 아랍인과 아프리칸 에티오피아인들로, 쿠시는 검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는 것을 보면 대략 아래와 같은 혈통의 사람들이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신속함을 의미하는 티그리스 강

 

티그리스는 페르시아어로 화살을 의미합니다. 풍요와 폭발에 이어 빠른 흐름 혹은 신속함을 의미하는 티그리스는 비교적 낯이 익은 강입니다. 티그리스 강은 시리아 북동쪽 국경 부근에 닿은 후 이라크를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흐릅니다. 고대 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가 바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있었죠.  

 

수정9

 

 

 시작이자 미래의 경계 역할 유프라테스 강

 

서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에 속하는 유프라테스 강은 터키의 아르메니아 산이 발원지입니다. 이 강은 지중해를 향해 서쪽으로 향하다 남쪽으로 급격히 방향을 튼 후 시리아을 통과하고 티그리스 강과 합류 후 페르시아 만으로 흘러들어가는 경로를 지닙니다. 물리적으로 가장 오래되고 구약에서는 유프라테스가 강을 대신하는 단어로 쓰일 정도이지만 유프라테스는 출발 혹은 돌파라는 의미를 지니는 의미가 있을 거로 봅니다. 유프라테스 강의 어원은 출몰하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하게 와닿는 부분은 유프라테스 강이 시간적인 경계로 표현되는 미래의 경계 역할을 의미한다는 어떤 이의 해석입니다. 

 

 

 

 

 쉬어라 살아라 섬겨라 지켜라

 

 

 

창세기 2장 15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 곳과 일 할 곳 그리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알려준 구절입니다. 그러나 대체 먹지 말아야 할 나무를 왜 심어두신 걸까요? 아이 엄마들도 아이에게 항상 위험한 물건을 두고서 건들면 안 된다고 합니다. 아이는 항상 위험한 물건을 만지고 엄마에게 벌을 받지요. 혹은 주의 사항을 미리 말해서 그것이 유혹으로 다가오게 만듭니다. 여하튼, 세상에 태어나서 어떤 부팅이 되는 순간 태초의 원죄가 이식되게끔 그러한 DNA를 만든 과정을 보여주는 구절이 아닌가 합니다. 

 

 창세기 2장 16절 구절은 섬뜩합니다. 그러나 생명수와 선악과를 먹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한 것이 일종의 경고라거나 겁박을 준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문득 사용설명서를 알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기계처럼 먹고 마시고 누리고 유지하려고 만든 인간에게 선과 악을 인식하는 과실을 먹지 못하게 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은 매우 단순한 생명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로 보면 누구나 시리 정도가 아니었으려나요.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닮은 로봇 인간을 만든 것이지 그처럼 지력을 줄 필요는 없어 보였던 거죠. 아니 창조주가 과학자였다면 아직 자신의 창조주가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는 예측불가였던 거죠. 그리고 에덴 정원에서 적응하는 것을 봐서 생명수도 먹이고 선악과도 먹여 업그레이드하려고 했는데 인간이 미리 먹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겨 실패작으로 평생 일이나 하라며, 고통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닮은 인간을 만든 후 그냥 무심하게 여성을 만든 줄 알았더니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을 보고 일종의 측은함을 느낀 것 같습니다. 정황상 아담은 창조주가 만든 자연의 산물과 어울리면서 이름을 지어주었나 봅니다. 그 모습이 좀 안쓰러웠던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should란 표현을 쓴 점이 그렇습니다. 

 

 

 

 이름의 오류

 

하나님께서 아담이라고 이름을 아직 안 지어준 것 같은데요. 워낙 인간 만들었다고 하면 곧바로 아담이 연상되어서 말입니다. 어쨌거나 기억의 오류가 아닌 이상 아직 아담이라는 이름이 거론되기 전이라고 생각하고 서술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창조주가 인간 남자를 보고 그의 발상에 흥미를 느낀 건 아닐까요? 정황상 남자가 각종 생명체에게 이름을 부르며 놀고 있던 것이니까요. 허허. 저놈 봐라. 이름을 짓고 놀고 있네. 창조주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인간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확실히 흙먼지로 만든 인간은 하나님의 장난감 즉 애완인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것을 느낀 이유는 수준 차이가 너무 난다고나 할까요? 인간 남자는 창조주를 닮은 형상일 뿐 행동 양식이 매우 2차원적이라고 보여집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그냥 어린아이처럼 연상되는 겁니다. 성인 남자가 옷도 안 입고 정원을 뛰놀면서 거기 사는 동물들에게 자기가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지어주고 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를 흥미롭게 본 창조주는 그가 사물에게 지은 이름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조금도 정정하거나 지적하는 것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담은 히브리어로 인간을 뜻한다고 합니다. 또한, 히브리어는 빨강 혹은 땅의 의미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요. 하나님이 인간을 땅으로 만들었고 땅은 붉기에 그런 뜻을 담은 아담이라고 부른 모양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man이라고도 나와서 man이 사람이고 아담은 이름이겠거니 생각했더니만 아담도 그냥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습니다. 

 

이렇게 흙에서 기원한 사람을 그런 특징을 설명한 아담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흙과 사람을 합친 뜻의 아담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를 이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냥 강아지더러 강아지야, 고양이를 야옹아, 하고 부르는 정도와 같은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차이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의 이름에도 분명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너는 흙에서 태어났으니 아담이라고 하겠다는 인증이 없습니다. 그냥 한국식으로 풀이하면 흙에서 태어난 인간이 그대로 직역된 아담이었던 겁니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도 아담은 그가 돌보는 가축들과 새 그밖의 모든 동물들에게 고유의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주인의식과 책임감 혹은 정서가 충만하거나, 무료함을 달래보고자 일종의 놀이 차원에서 지어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간에 사람이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것들보다는 우위에 있으며 권위가 있다는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피조물인데 아담이 이름을 멋대로 지은 것은 어찌 보면 혼날 일이 아닌가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습을 보고 아담을 위해 조력자를 찾아 줄 생각을 합니다. 이게 좀 아이러니한 부분입니다. 

 

 아담의 깊은잠

 

 

창세기 2장 20절 하나님이 특별히 명한 것도 허락한 것도 아닌데 아담은 동식물에게 이름을 지어서 불렀고 이를 본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합니다. 마취제를 놓은 것이 아니면 일종의 최면술로 깊은 잠에 빠지게 한 것이 아닐까요?

 

아담이 잠든 사이도 아니고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한 것이 포인트 같습니다. 마치 수술 전 마취를 놓듯이 하나님이 아담에게 단순 잠이 아닌 고통을 잊는 다른 차원의 잠에 빠지게 한 겁니다. 이를 공상과학적으로 상상하자면 일종의 리셋 과정이 아니었으려나요? 건전지를 빼둔다거나 전원 코드를 뺀 후 재 조립한다거나요. 아무튼 아담을 그와 같은 상태로 만든 이유는 아담을 도와 줄 파트너를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아담의 갈비뼈로 여성을 창조한 까닭

 

 

그러니까 아담이 혼자 이름 짓기 놀이하는 걸 안쓰럽게 여긴 것인지 어쩐 것인지 이를 보시고 그를 깊게 잠들게 한 후 그에게서 갈비뼈를 하나 뽑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갈비뼈를 뽑은 걸까요? 대체 갈비뼈가 의미하는 게 뭘까요? 옆구리가 시리다는 표현은 성경 구절에서 착안해서 나온 말인 것인지 실제 인간이 추위를 가장 먼저 느끼면서 파생된 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옆구리가 시리다는 표현은 실제 추워서 쓰기 보다는 외롭다는 비유적 표현으로 쓰긴 하지만요. 

 

또한, 한국말로 갈비는 갈라지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갈비뼈가 내장을 보호하는 일종의 창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런 것을 떠나 아담의 갈비뼈로 여성을 만든 것은 하나의 뿌리에서 갈래를 뻗은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혹은 식물의 가지치기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수정9

 

루터는 몸 안에 있는 갈비뼈가 아닌 살이 붙어있는 갈비뼈를 뽑은 거라고 하던데요. 그렇다면 아담은 다소 기형적인 체형으로 태어났던 건가요? 옆구리에 혹이 있었다는 건가요? 또한, 근거있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창조주가 아담의 오른쪽 13번째 갈비뼈를 가져갔다는 내용도 나옵니다. 보통 인간은 12개씩 쌍을 이루어 24개의 갈비뼈가 있는데 간혹 이보다 한 두개 많이 달린 사람도 있다잖아요. 그래서 아담은 12개가 아닌 13개의 갈비뼈가 있어서 불필요한 갈비뼈 하나로 여성을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한, 갈비뼈는 놀라운 재생력이 있어서 뼈를 뽑은 자리에 늑골이 새로 자란다고 하는데 12개의 갈비뼈에서 하나를 뽑고 하나는 다시 자랐다는 건지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골수 채취를 한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갈비뼈는 은유적인 표현이고 그냥 측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일단 아담의 발뒤꿈치가 아닌 옆구리에서 여성을 만들었다는 것으로 동등한 인격체라고 뭐라뭐라 하는데요. 좀 구차하게 여겨집니다. 보다 현실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하자면 아담의 갈비뼈에서 골수를 채취한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그것으로 이브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남과여의 의미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들었을 때 하나님이 말하지 않고 남자가 말한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남자는 나의 뼈와 살이니 여자라 하겠다고 이름 비슷한 호칭을 짓습니다. 그녀는 남자에서 나온 거라고 말하면서요. 이 구절도 참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남자가 생명체에게 이름 짓는 것을 보시고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한 것이 아닌 남자가 말을 하게 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는 어떤 종속적인 관계를 내포하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 혹은 서로 의지하고 의존하는 관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남자는 man 여자는 woman이라고 한 데에는 이처럼 성경을 읽으면 이유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woman은 줄인 표현이고 원래는 wimman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wifman 으로 파생된 것인지 어쩐지 변천사를 겪었는데요. 와이프를 의미하는 wife가 붙어서 wifman이 여차여차해서 woman으로 된겁니다. 중요한 것은 여자의 역할이 태초에 남자의 조력자 혹은 동반자 개념으로 사용된 겁니다. 그러니 남과 여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마지막 구절은 하나님이 여자를 만들고 이들에게 일종의 부부의 연을 맺어주려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계약까지는 아니지만 하나가 되라고 하시니 부끄러워 말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살이 되어라?

 

창세기 2장 24절~25절 마지막 구절에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에게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하나의 살이 되는 것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부부가 하나가 되었다는 요즘에도 통용되는 비슷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많은 해석들이 결혼 제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요. 그전에 남과 여는 부모 자체가 없는데 아니 부는 있더라도 모는 그 어디에도 없는데 부모로부터 떨어져 독립된 하나의 살로 살라는 걸까요?

 

 

어차피 얘네들은 선악과도 먹기 직전이라서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었을 텐데 하나님은 하나가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를 두고 많은 학자들은 성경에서 부끄러움을 나타낸 표현은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후에 이해하기 쉽도록 재해석된 것이었다고 치더라도요. 하나님께서 하나의 살로 구성된 이 남녀를 탄생하자마자 알몸으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 둘에게 합체를 명하신 것 같네요. 일단 번식이 중요해서 그랬으려나요?

 

 

어찌되었든 하나님은 홀로 외로워 보이는 아담을 위해 짝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한 몸에서 태어났으니 한 몸이 되어도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점이 기괴하게 느껴집니다. 더군다나 애초부터 부모가 없는 애들인데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둘이 평생 함께하라고 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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