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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세계 3대 미남 중 한명이던 비에른 안데르센

by winter-art 2024. 1. 3.

스웨덴 스톡홀름 출신의 비에른 안데르센은 그가 15살 밖에 되지 않은 나이에 단 한 편의 영화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사랑받는 얼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세계 3대 미남 중 한명으로 알랭들롱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리고 비에른 안데르센을 꼽고 있는데요.

 

 

 

비에른 안데르센 스토리

 

 

 

 

 

 

 

정작 그는 자신의 외모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다며 괴로워했습니다. 60대 후반이 된 비에른은 덧없이 늙은 모습에 몸이 말랐고 마치 반지의 제왕 속 간달프를 연상케 할 정도로 환상적인 은발머리를 휘날리고 수염을 기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잘생김보다는 위엄있는 저승사자 혹은 일종의 유령 같은 모습입니다.

 

 

 

 현재 그는 스톡홀름의 작고 으스스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퀴퀴한 순간의 후유증을 앓고 결코 그가 원하지 않았던 유명세와 여전히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순자산은 200만 달러에 달하니까요. 다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악몽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을뿐입니다.

 

 스웨덴 스톡홀름 태생의 비에른

 

 

 

비에른 안데르센은 1955년 1월 26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없이 태어났으며 평생 친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난 해에 그의 어머니는 노루웨이 남자와 만나 결혼해 딸을 낳았고 4년 후 이혼했습니다. 

 

탐사 기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자유로운 예술가 성향이 다분했습니다. 그녀는 미술 갤러리도 운영하고 크리스찬 디올의 모델로 일했을 정도로 미모와 재능이 출중했습니다. 그녀는 아들과도 사이가 돈독하여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비에른이 10살 때 갑자기 실종된 후 1년 뒤인 1965년 숲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그녀의 유언이 발견되면서 자살로 판명이 났습니다. 

 

 

 

 

 아역배우 데뷔

 

 

 

어머니를 잃은 어린 비에른과 그의 이부 동생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집안 환경이 그리 어렵지 않았음에도 그의 할머니는 잘생긴 손자를 유명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는 스톡홀름의 베니스에서 열리는 죽음의 캐스팅 장소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영화계의 거물이었던 돈 루치노 비스콘티 백작이자 재력가인 영화 감독은 자신의 재력과 재능 그리고 변태적인 취향으로 예술혼을 불사르는 문화적 포식자였습니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가장 완벽한 미소년을 찾기 위해 몇 년 동안 동유럽 전역을 돌아다녔고 마침내 비에른을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캐스팅 확정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가 찾은 배우는 비에른보다 나이가 더 어려야 했지만 비에른을 본 순간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렇게하여 비에른은 1971년 개봉한 영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속 타치오 역할을 맡았는데요. 영화 이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란 별명이 그를 평생 낙인처럼 따라다니게 됩니다.

 

 

 

영화는 1912년 토마스 만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전설적인 후기 낭만주의 음악가 구스타프 말러의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한 소설이었죠. 주인공 구스타프는 말년에 미소년 타치오를 짝사랑하다 죽어갔는데요. 미소년을 향한 동성애적 성향이 작가 토마스 만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한 고백인지 아닌지를 두고 문학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한 작품으로도 유명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BL물로 볼 것이 아닌 토마스만 특유의 예술에 대한 지식과 시각적 묘사가 만연체로 쓰였으며 니체 철학이 깃들인 명저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감독 루치노는 이 소설을 노골적으로 자신의 성정체성을 담아 퀴어물로 제작했던 것이고요. 물론 시대는 그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최고 감독이라 칭찬하며 그의 뛰어난 영상미와 유미주의적 연출은 아무도 따를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영화 탐미주의자라는 평을 받아왔지만 그의 예술성이 대중적 흥행으로는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비에른 안데르센이 등장한 영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그의 개인적인 취향과 유별난 행동이 어린 비에른에게 악몽같은 상처를 남기게 되었고요.

 

 

 수치와 모욕의 시간들

 

 

영화 내용과 영화를 찍는 과정 속 선정적인 장면의 요구도 비에른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았지만 영화 촬영 후 감독은 어린 그를 게이바 같은 곳에 데리고 다녔으며 비에른은 많은 동성애자들의 흠모하는 시선을 느껴야 했습니다. 아마 그 자신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요?

 

 

 

 

또한, 영화 개봉 후 학교 생활을 하는 것도 그에게는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본래 락가수를 꿈꾸던 터프한 성향의 비에른에게 남학생들이 안녕, 천사의 입술이라는 인삿말을 한다거나 사춘기 소년에게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은 수치와 모욕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비에른은 이 상황을 완전히 뿌리치지도 못하고 지속해서 악마의 소굴에 놓여야 했습니다. 

 

예술 영화로 분류된 터라 대중적인 흥행은 하지 못했지만 영화 개봉 후 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년이란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또한, 최초의 아이돌 스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소년에 대한 소속사의 잘못된 관리로 인해서 그의 이미지와 앞날도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일본의 아이돌 스타

 

 

 

그는 특히 일본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덕분에 일본에서 락 밴드 가수로 데뷔도 하였는데요. 머리를 염색하고 탱크탑을 입고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며 그 나라의 아이돌 스타가 되었습니다. 또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 속 남장 여자 오스칼과 올훼스의 창(오르페우스 창)의 유리우스란 캐릭터를 만들며 그는 불멸의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20대 초반이 된 그는 어느새 성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구애하는 나이 든 남자들에게 넉넉한 용돈을 받았고 다양한 남자 팬들로부터 식사와 선물을 받으며 젊은 날을 허비했습니다. 그는 스웨덴에서도 가수로 데뷔하고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비록 어린 시절에 동성의 늙은 남자들에게 팔려다니긴 했지만 그는 완벽한 이성애자였고 결혼해서 아이들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아이들 중 한 명은 태어난지 9개뭘만에 잃은 불행을 겪었고 그때문에 부부 사이도 원만하질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불행의 원인을 사춘기 시절 자신을 희롱한 감독 탓으로 돌렸습니다.

 

이는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이들에 대한 경각심을 주기도 했는데요. 젊은 스타의 아름다움의 상품화에 대한 경고와 그것들이 남은 인생에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와 공포, 트라우마, 죄책감, 우울증의 세대적 순환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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