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 태생으로 배우 데뷔 후 미국인으로 귀화한 캐리 그랜트는 영화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중요한 배우로 평가받았습니다. 4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쳐 시대를 초월한 매력을 보여주었고 관객들의 마음을 훔치며 비평가들의 관대한 평가를 받아 넘치는 사랑을 받은 배우입니다.
남자들의 워너비 배우 캐리 그랜트
존 F 케네디 대통령부터 갱스터 러키 루치아노에 이르기까지 많은 남자들이 자신들의 인생 이야기가 영화로 나온다면 주인공은 캐리 그랜트가 되기를 원한다고 할 정도로 워너비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서스펜스의 대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평생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배우는 캐리 그랜트였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불행한 어린 시절
1904년 1월 18일 영국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캐리 그랜트의 본명은 아치볼트 알렉산더 리치입니다. 그의 집안은 처음에는 부유했으나 무슨 이유 때문에 몰락했고 그는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알콜 중독자 아버지와 고압적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이었고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먼 비참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11살 때 신경쇠약을 치료하기 위해 가까운 정신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캐리는 엄마가 해변의 휴양지로 여행을 한 것으로 알고 있었고 얼마 후 그녀가 사망했다고 들었지만 20년 후 그의 아버지가 간질환으로 사망한 후 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머니의 부재 이후 아버지는 더 난봉꾼으로 살았고 아들은 방치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석하던 캐리는 공부에도 흥미를 잃었고 일찍부터 극단 단원이 되어 끼를 부리는 직업을 삼기로 결정합니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루미스 극단이라는 곡예사 극단에 합류하여 보드빌 스타가 되었습니다. 16살이 된 캐리는 자신이 배운 기술을 제대로 써먹기 위해 뉴욕에 머물렀습니다. 성장 과정이 마치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를 보는 것 같습니다.
배우가 되기까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도 발을 디디며 스타가 되길 꿈꿉니다. 그에게 연기자가 되는 것은 부자가 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극 무대는 물론 카메라 앞에서도 그는 부진을 면치 못했고 빛도 못 보고 퇴출되는 위기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캐리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시도에 시도를 거듭하여 4년 후 성공한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930년대 헐리우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배우로 등극합니다.
1931년 캐리는 파라마운트 픽쳐스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캐리의 어릴적 정서적 환경적 결함이 배우 생활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지 몰라도 사생활 특히 여자관계에 있어서는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캐리 그랜트의 문제적 사생활
1932년 마를렌 디트리히와 함께 찍은 금발의 비너스로 그는 인기있는 배우가 되었고 1934년에는 배우 버지니아 셰릴과 결혼하였습니다. 발연기로 유명했던 그녀에게는 두 번째 결혼이었으나 이들의 관계는 1년 만에 끝이 났습니다.
1930년대 중반을 넘어 1940년대는 캐리 그랜트의 시대였습니다. 또한, 1936년 영화사와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을 하지 않고 프리랜서로 활동하여 성공한 사례를 만든 배우이기도 했습니다. 1942년 캐리 그랜트는 미국 시민권자로 귀화하였고 7월 8일에는 상속녀 바바라 허튼과 결혼하였으나 1945년 바바라 허튼의 소송으로 이혼하였습니다. 1949년에는 영국 여배우 벳시 드레이크와 결혼하여 13년간 지속했습니다.
1950년대는 부부 생활의 권태기를 벳시의 추천으로 LSD를 함께 복용하기 시작하였는데요. 당시에는 LSD를 신기한 명약 취급하는 경향이 팽배했기에 요가와 명상을 더해 LSD를 복용하였고 그는 졸지에 의도치 않게 약물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lsd와 함께 찾아온 해방과 평화에도 이들의 결혼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1957년에는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소피아 로렌과 함께 스페인에서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소피아 로렌은 촬영이 끝나기도 전에 맥시코에서 카를로 폰티와 변호사끼리만 참여한 법적인 결혼식을 진행하였습니다. 카를로 폰티는 캐리 그랜트보다는 약간 더 젊었고 결혼식만 안 올렸지 불륜으로 인한 동거 중이었기에 결혼식은 그저 캐리 그랜트와 외도를 한 것으로 인한 참회의 차원에서 진행한 것이었고요. 캐리는 내심 쿨한 척하면서 소피아 로렌의 행복을 빌어줬지만 아내 벳시와는 헤어졌습니다.
먼 훗날 소피아 로렌은 인터뷰 중 이렇게 말했습니다. 캐리 그랜트의 멋진 모습을 보고 숨이 막혔다고 하였고 서로 불륜을 인정했지만 캐리가 그녀에게 청혼한 적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965년 캐리 그랜트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여배우 댄 캐넌과 결혼하였고 둘 사이에는 딸 제니퍼 그랜트가 태어났습니다. 늘그막에 태어난 딸이 그에게 가져다준 기쁨은 너무 커서 딸에게 더욱 전념하기 위해 은막에서 은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1968년 3월에 그는 또 이혼했습니다.
1981년 4월 11에 그는 무려 47세 연하의 영국 호텔 홍보 담당자 바바라 해리스와 결혼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결혼이었고 죽는 날까지 그녀와 행복하고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아마 그의 수명이 더 길었더라면 그녀와도 어떻게 지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986년 11월 29일 그는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 몸이 아팠고 의사를 부르니 뇌졸중이라며 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캐리는 거절하고 죽음을 기다렸습니다. 15분 후 그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나이 82세였습니다.
미스터 더치 페이로 불렸던 남자
캐리 그랜트는 성공한 배우가 되기위해 운빨보다는 자신의 피나는 노력으로 최고의 스타가 되었지만 그에게 있어 성공은 미묘한 고문이었고 그 고문은 죽는 순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성공한 삶을 산 배우임에도 언제든지 추락할지 모른다는 염려가 가득했고 그런 염려는 경제관에도 잘 나타났습니다.
세계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번 스타 중 한명이었음에도 돈을 쓰는 것에 매우 신중하였으며 남을 위해 돈을 쓰는 것도 싫어했지만 남이 사주는 것도 싫어해서 항상 더치 페이를 추구했다고 합니다. 또한 밖에서는 세상 좋은 사람이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였으며 집에 손님을 거의 초대한 적이 없는 스타였습니다.
뭔가 영화 속 이미지와는 다르게 인색하고 괴팍한 기질이 종종 엿보이는데요. 남한테 결코 피해는 주지 않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유언으로 장례식을 생략하라고 했다는데요. 죽는 순간까지도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되는 걸 추구한 모양입니다.
'문화 예술 창고 > 캐릭터 스토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3대 미남 중 한명이던 비에른 안데르센 (1) | 2024.01.03 |
---|---|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 지나 롤로브리지다 (1) | 2023.12.11 |
1930년대 아메리칸 리틀 달링 셜리 템플 스토리 (0) | 2023.11.09 |
우마 서먼의 엄마이자 60년대 톱모델 네나폰슐레브루그 (0) | 2023.10.31 |
다면적인 사생활과 사고방식을 소유한 배우 리차드 버튼의 사생활 (0) | 2023.10.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