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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예술 창고/캐릭터 스토리

1930년대 아메리칸 리틀 달링 셜리 템플 스토리

by winter-art 2023. 11. 9.

셜리 템플은 1928년 4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의 유복하고 원만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러한 셜리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게을렀던 시기는 태어난 후 단 2년뿐이었습니다.그녀 엄마는 셜리가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그녀를 1931년 무용학원에 등록시켰습니다.

 

 

 

 

아이큐 155의 천재 소녀

 

 

 

 

1930년대 셜리 템플은  세 살 때부터 활동하여 귀엽고 깜찍한 외모에 곱슬머리와 보조개로 미국 최악의 경제 침체기에 놓였던 미국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린아이가 너무 어른스럽게 굴면 꺼려하는 이들조차도 그녀를 보면 누구나 사랑스러운 하트 눈이 될 정도였습니다. 

미국 역사상 역대 이렇게 특별한 재능으로 인기가 있던 다른 아역 스타는 나온 적이 없다고 할 정도인데요. 그녀가 영화 속 탭 댄스를 추는 것만 봐도 얼마나 출중한 재능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탭댄스를 오직 소리로만 듣고 마스터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녀의 아이큐는 155가 나왔다고 합니다. 

 

 

 

 

 

 

어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아이콘

 

어린아이들이 으레 산만하듯이 셜리는 엄마와 호텔에 왔다가 로비에서 춤을 추면서 놀고 있었습니다. 이를 유심히 본 관계자가 그녀에게 다가왔고 그녀의 엄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야심 찬 엄마 덕분에 6살이 되기 전에 20세기 폭스사와 전속 계약을 맺었고 그녀는 기저귀만 찬 채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첫 데뷔부터 주목을 받았습니다. 미디어 시대가 도래하면서 아역 배우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역대 이렇게 사랑스럽고 재능 충만한 아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그녀를 닮은 인형은 불티나게 팔렸고 한 호텔에서는 그녀를 위한 무알콜 칵테일, 이름도 셜리 템플이란 이름으로 판매되었습니다. 

 

 

 

 

 

 

셜리 템플이 영화 속에서 주로 맡은 배역은 어른들에게 감동과 교훈을 주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온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캐릭터였는데요. 1930년대 미국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사람들은 셜리 템플을 보고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이 괜찮아, 우리에게는 셜리 템플이 있으니까,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셜리 템플의 과도기

 

셜리 템플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그녀의 외모도 관객들의 관심도 느슨해졌습니다. 일단 키가 많이 크지 않았고 외모도 이미 2살 때 완성된 외모에서 조금 늘어난 정도로 빼어난 미인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 시기까지 배우 활동을 하면서 그럭저럭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셜리는 일찍부터 담배를 피웠고 그녀의 죽음에는 담배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물론 85세로 살만큼 살다가긴 했지만요.

 

셜리는 19살에 배우 존 아걸과 결혼하였습니다. 당연히 영화 촬영 중 만난 파트너였겠죠. 하지만 존 아걸은 셜리 템플만큼의 인기도 보수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존 아걸은 급격히 절망하였고 다음 해 딸이 태어났지만 존 아걸은 알코올 중독에 바람까지 피웠습니다. 그래서 2년 만에 그녀는 이혼하였습니다. 

 

두 번째 결혼과 정치계로 입문

 

셜리는 이혼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다른 남자를 만났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부유한 청년 중 한 명인 찰스 올든 블랙이었습니다. 그와는 나이차가 9살이나 났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요. 찰스는 셜리 템플의 어린 시절 영화를 한편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셜리가 활약할 때 찰스는 완전한 어른도 아닌 애매한 청소년기였으니 아이가 나온 영화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 같긴 합니다. 찰스는 셜리를 너무 사랑했고, 상류 사회에서는 찰스가 한물간 여배우와 결혼했다고 상류 사회 명부에서 그를 제외시켰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둘은 아이 둘을 낳았고 20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평생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다시 돌아가 1950년 결혼하자마자 셜리는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고 내조에 전념하였습니다. 한편 동맹국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워싱턴으로 이사 왔습니다. 백악관과 밀접한 일을 하게 되면서 셜리도 자연스럽게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영부인이 되는 것도 생각했겠지만 남편은 그런 일에는 소질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남편은 텔레비전 방송국을 운영했고 셜리는 세 아이를 키우며 전업 주부로 사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캘리포니아 지역구 공화당 의원이 암으로 사망하자 보궐 선거에 출마할 결심을 합니다. 하지만 셜리는 경험도 부족했고 전략도 부족했습니다. 선거 유세로 어릴 때 자신이 불러서 히트 친 롤리타 어쩌고 저쩌고를 불러댔으니 말입니다.  겨우 1%의 득표를 하고 상원의원은 되지 못했지만 닉슨과 레이건을 친구로 둔 덕분에 닉슨 대통령이 되자 그는 그녀에게 유엔 미국 대표단으로 임명했습니다.

 

 

 두 번의 외교관 생활

 

대중은 아역 배우 출신의 셜리가 정치를 잘할 수 있을까 우려하는 시선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그녀를 체코 대사로 임명하자 일부 외교관들은 분노를 표출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외교의 신으로 불린 헨리 키신저는 그녀를 무시하는 기색이 역력하고 가스라이팅도 했고요.

 

 

 

 

역시나 엄혹한 시기에 강경한 키신저와 가나 정부의 싸움에 휘말려 셜리 템플은 대사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녀는 지미 카터 대통령 의전 담당을 맡게 됩니다. 여성으로서는 최초의 직무였다고 합니다. 1989년 그리고 조지 부시 대통령은 그녀에게 체코 대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체코가 이념 전쟁으로 한창 긴장이 팽배할 때 셜리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반체제 혁명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고 소위 벨벳 혁명은 성공하여 그녀는 키신저에게 칭찬을 들었습니다. 

 

일찍부터 인기를 누린 최고의 배우였지만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단 한순간도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살다 간 셜리 템플은 모든 아역배우들이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미국인 입장에서 그녀처럼 애국심으로 무장한 사람도 드물어 보일 테고, 셜리 템플은 미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은 만큼 국가를 위해 소명을 다하고 간 것 같습니다. 물론 1930년대 미국인들은 그녀에게 더 고마워했을 테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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