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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훑어보기

by winter-art 2021. 9. 28.

나는 남자의 사진을 , 적이 있다. 아이의 웃는 얼굴은 볼수록 불쾌하고 기분이 나쁜 것이 느껴진다. 인간의 웃음과는 어딘가 다르다. 피의 무게라고 할까, 생명의 깊이라고 할까.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인간실격 중

 

 

부끄러움이 많은 생애를 보내 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해 자주 몸져누웠습니다. 공복이라는 것을 몰라서 식사 시간을 무서워했습니다. 인간은 어째서 하루에 세번씩 밥을 먹는 걸까, 실로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먹고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의식 같은 것으로 모르겠습니다. 이웃 사람의 괴로움의 성질, 정도가 전혀 짐작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이것도 역시 저의 유치하고 슬픈 익살의 일종이었습니다.

 

 

사람의 화난 모습에서 동물의 본성을 봅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기면 되는 거다.

 

장난감보다는 오히려 책이 좋았습니다. 완전에 가깝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어떤 한 전지전능한 자에게 간파당할까봐 겁이 났습니다. 어차피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소용없어. 인간에 대한 불신은 반드시 종교의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속이면서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자신을 가지고 있는 듯한 인간이 난해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시작된 나의 불안과 공포 사랑받는 불안

 

여자는 죽은듯이 깊게 잔다. 여자는 자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닐까.

 

다케이치의 무지한 아첨이 불길한 예언으로 생생하게 살아나 불길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중대한 선물을 했습니다.

 

 

 

 

요괴 그림이야.

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실에서 어떤 미술학도로부터 담배와 매춘부와 전당포 그리고 좌익 사상을 배웠습니다. 그 미술학도 오리키는 도쿄 번화가에서 태어났고 저보다 여섯 살 연상으로 사립 미술학교를 졸업했으며. 저는 그가 하는 말에 전혀 경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멍청한 인간이군. 그러나 놀기에는 좋은 상대일지도 몰라, 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저는 그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정한 도회의 멍청이를 본 것입니다.저와 같이 갈피를 못 잡는 동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익살 연기를 의식하지 못한 채 행하고 그 익살 연기의 비참함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점이 저와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덤으로 주는 부록을 선물 받았고 그것이 선물보다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비합법, 저는 그것이 은근히 즐거웠던 것입니다. 저는 인간들의 다툼에 가급적 끼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하는 데 지친듯했고.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만 살아남았습니다.

진짜인가.

침착한 미소였습니다.

 

세상 사람들 전부가 말하는 방식에는. 어딘가 분명치 않으며 달아날 길을 만들어 놓은 듯한 미묘한 복잡함이 있는데 그 대부분이 무익하다고 할 정도의 엄중한 경계와 무수하다고 할 정도의 성가신 수술에 언제나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 패배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넙치의 경계

 

 

 

넙치의 불필요한 경계, 아니 세상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허영과 허세에 참으로 우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경멸의 그림자를 닮았는데, 세상의 바다에 비유하자면, 바다의 깊이가 천 길이나 되는 곳에 기런 기묘한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을 것 같은, 어쩐지 어른들의 생활 밑바닥을 언뜻 보여주는 듯한 웃음이었습니다. 저는 모두에게 붙임성이 좋은 반면 우정이라는 것을 한 번도 실감한 적이 없고, 모든 사귐은 그저 고통스러울 뿐,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열심히 익살을 부리고… 생각해보면 호리키는 지금까지 저와 지내면서 뭐 하나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영원히 메우기 어려울 것 같은 상실감을, 혼자서 그렇게 형용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리에서 맴돌 뿐인 번민을 하다가 갑자기 생각을 바꿔 포기했습니다.

 

무서워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모두가 나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나는 무서워서 모두로부터 멀어져 가야만 하는… 이 불행하고 병적인 버릇을 설명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타인, 불가해한 타인

 

세상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인간의 복수일까요? 어디 그 세상이라는 것의 실체가 있을까요? 인간은 서로 전혀 상대를 알지 못하고 완전히 잘못 보고 있으면서 둘도 없는 친구라고 여기며, 평생 그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상대가 죽으면 울면서 조사를 읽는 것이 아닐까요. 그대 개인의 무서움,  세상이란 개인이 아닌가라는 이상적인 관념을 갖게 되었습니다.

 

개인과 개인의 다툼에서 특히 그 자리의 다툼에서 특히 그 자리에서 이기면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노예조차 노예다운 비굴한 보복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그 자리의 단판 승부에 의지하는 외에 살아남을 방안이 없는 것이다. 세상의 난해함은 개인의 난해함. 대양은 세상이 아니라 개인인 것이다. 저는 세상에 대해 서서히 경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무서운 것을 보고 싶은 마음

 

호리키와 나 서로 경멸하면서 사귀는, 그리고 서로가 스스로를 하찮게 만들어 가는, 그것이 이 세상의 소위 교우라는 것이라면 저와 호리키 관계도 확실히 교우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나는 아직 너처럼 포박당하는 수치 따위를 당한 적이 없어.

 

나란히 앉아 콩을 먹었습니다.

아. 신뢰는 죄인가. 무구의 신뢰심은 죄인가. 하지만 제 불행은 모두 제 죄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항의할 수 없고. 저의 불행은 거부의 능력이 없는 자의 불행이었습니다. 누군가 권한 것을 거부하면 상대의 마음에도 제 마음에도 영원히 수선할 수 없는 하얀 틈이 생길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이제 저는 죄인 정도가 아니라 광인이었습니다. 결코 저는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신에게 묻는다. 무저항은 죄가 되는가.

인간 실격

그야말로 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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