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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book/성경 자의적 해석

살인자의 율법, 모세의 슬픈 위대함

by winter-art 2025. 4. 11.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 아닌 권력의 최대한이란 것을 성경을, 모세를 보면 알 수 있다. 결국 자기변호의 정치와 통제 수단으로 수많은 율법을 만든 모세의 실체를 알아보자.

 

 

자기변호의 정치, 모세의 율법

모세는 살인자였다. 우발적이든, 충동적이든, 정의감에 사로잡혔든지, 정당방위였든지 간에 한 사람을 생명을 앗아갔다. 이집트 왕자로 자란 그에게 정체성의 혼란, 그런 것을 떠나 그는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고 광야의 무명인이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광야에서도 나름 이름 있는 미디언 족장의 사위가 되었다. 십보라를 아내로 얻으며 자라온 환경에 비해서는 처참한 수준일지 몰라도 나름 사는 것처럼 살았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도망자가 아닌 신의 대변인이 되어서 나타났고 이집트로 돌아가 자신의 백성들, 노예로 일하고 있던 그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선포하였고 성공하였다.

 

 자기 변호를 위한 살인자의 율법

법은 단순히 죄를 규정하고 처벌을 명하는 문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혹은 사회가 과거의 선택, 실수를 정당화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방어막으로도 볼 수 있다. 모세는 고의가 아닌 살인은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다, 억울하게 죽인 자를 함부로 정죄하지 말라고 하였다. 모세의 법은 그렇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항목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도피의 시간, 자신의 죄책감, 그리고 살인자로서의 정체성을 법으로 구조화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법이란 언제나 발의자의 그림자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에 드리워진 모세의 패턴

이런 패턴은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현대 정치는 종종 자기변호의 무대로 전락한다. 입법자들은 새로운 규범을 만들지만 그 법은 공공선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입지, 실패를 정당화하는 방패로 쓰고 있다. 현재 민주당의 입법 독재 행태를 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이 당만을 탓할 것은 못되겠지만...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정치인이 갑자기 투명성 강화법을 발의하고, 권위주의적 통치를 해온 세력이 자유보장 조항을 내세우고, 독점 기업과 결탁한 이들이 공정거래법 개정을 논의한다. 시위꾼들을 보호한다며 노랑봉투법까지 발의했다는데 기가 찰뿐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법을 만든다. 그러나 그 법은 오로지 특정한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함이며 역사의 법정에서 자신들을 무죄로 만들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한국 정치에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수없이 겪어 왔다. 국민의 삶과는 동떨어진 법안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법이 더 이상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닌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것이 돼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누구를 위한 법인가

모세나 현대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수많은 법안들 중 일반 시민에게 실질적으로 유익한 것들은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법은 점점 두꺼운 법전 속에 숨어버리고, 복잡한 절차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을 더욱 침묵하게 만들며 결국 권력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기능한다. 이런 법은 대체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 모르겠다.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면서 왜 그 법은 가난한 자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억울한 자의 밤을 무시하고 현실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무서운 벽이 되어 돌아오는지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모세의 시대부터 현대까지 법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이 아닌가 싶다. 

 

 모세의 슬픈 위대함

 

모세는 단순히 율법을 만든 것으로 추앙받을 위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통치를 위해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쉴 새없이 일해야 오히려 불평이 줄어들듯이, 모세는 율법으로 사람들을 채찍질했다. 그의 율법은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상처가 충돌한 틈 사이에서 어떻게든 체제를 유지하고 자기 존재를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 언어의 창조자에 불과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법을 부여했고, 자신이 만든 법을 넘지 못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율법의 창조자였지만 율법의 죄인이기도 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겠다고 했으나 정작 자신은 그곳에 발을 디딜 수 없다고 한 것이 그의 마지막 자기변호였다.

 

 

 법은 누구 편인가

우리는 모세를 통해 깨달아야 한다. 법은 때로 자기 회피의 기술이고 불완전한 자의 유산이다. 그리고 그 유산이 진정으로 거룩해지려면 그 법이 결국 누군가의 고통을 보호하는 구조로 진화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은 살아 있는 정치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명예에 집착하는 자기 기념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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