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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book/일상 생각과 그림

신호등에서

by winter-art 2022. 7. 19.

 

 

 

 

신호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성급하게 앞서 걸어가려는 남자가 있었다. 고등학생뻘되는 딸과 함께 횡단보도에 서 있던 여자는 의기양양한 말투로 남자를 만류했다. 딸 앞에서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의지가 강해보였다. 이 사회에 규칙을 어기는 사람은 비난 받아 마땅하니 너도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를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돈 안들고 생색내기 딱 좋은 교육이니까. 남자는 여자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안달을 내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뒤에서 관망하던 나는 조급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가난한 사람은 여유마저도 없구나. 조금 앞서 간다고 뭐가 달라질까. 아저씨 그렇게 급하게 가다 골로 간다고요. 이런 생각도 했다. 누가봐도 가난해 보이는 남자의 그 가난의 원인은 인내심 부족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참으로 많은 하찮은 생각을 했고 남자의 입장에서 신호는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신호가 바뀌자 남자는 제일 먼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남자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다. 어깨춤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조바심이 느껴졌지만 그의 다리는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 것 같았다.

 

 

제 시간에 신호등을 건너지 못한 초조함이 신호가 바뀌기 전부터 걷는 습관으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좀 전에 남자를 나무라던 여자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남자는 걷다가 뛰길 반복하며 걸었는데 보폭수는 어린아이 만큼도 못되었다. 이미 모녀도 그를 앞질러 걷고 있었다. 긴 횡단보도를 건너고 짧은 횡단보도가 나왔을 때 빨간 불이 켜졌고 차는 꽉꽉 막혀 있었다. 사람들은 멈칫했으나 남자는 막힌 차들 사이로 쉼없이 걸어갔다. 그러자 사람들도 그를 따라 신호를 무시한 채 건너갔다. 오직 두 모녀만이 꿋꿋하게 신호를 기다리려고 서 있었다. 멈칫하던 나도 모녀를 앞질러 건너갔다. 

 

남자가 남들보다 앞서기위해 먼저 건너려고 했던 게 아니란 걸 안 순간, 모녀의 도덕심이 때론 융통성없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조금 더 서둘러 내 실속을 챙기고 싶어졌다. 겨우 2미터도 안 되는 신호등 규칙 따위는 어길 수도 있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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