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 창고/사유하는 방

빛의 기원을 더듬는 두 형제 그노시스와 프리메이슨

by winter-art 2025. 10. 26.

그노시스 학파와 프리메이슨은 인간의 오랜 집착, 즉 감춰진 지식에 대한 열망에서 태어났다. 하나는 고대의 신비 속에서, 다른 하나는 석공의 망치 아래에서 형체를 얻었다. 그러나 두 전통 모두 외부의 신이 아닌, 인간 내부의 불빛을 향했다. 그노시스가 신의 본질을 ‘앎’을 통해 찾았다면, 프리메이슨은 이성을 통해 신의 건축적 질서를 모방하고자 했다. 둘은 언어가 다를 뿐, 같은 어둠 속에서 같은 빛을 좇은 존재였다.

1. 감춰진 지식의 혈통

그노시스 학파는 초대 기독교 이전, 헬레니즘의 파편들 사이에서 태어났다. 플라톤의 사유와 유대 신비주의, 조로아스터의 불꽃, 이집트의 그림자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이 물질의 감옥에 갇혀 있다고 믿었다. 구원은 믿음이 아니라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세상의 구석구석에 흩어진 신의 파편을 되찾는 일, 그것이 곧 앎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논하지 않았다. 진리를 회복했다.

 

프리메이슨은 한참 뒤의 일이다. 14세기 석공의 길드에서 태어난 그 집단은 처음엔 손으로 돌을 다듬는 사람들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고 계몽의 바람이 불자, 그 돌 위에 인간 이성의 문양을 새겼다. 그들은 신을 ‘위대한 건축가’라 불렀고, 인간이 이성을 통해 그 건축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교회의 종소리 대신 망치 소리가 울렸고, 신앙 대신 상징이 남았다.

2. 내면의 성전

두 전통을 잇는 것은 하나의 사상이다. 신은 외부에 있지 않으며, 인간의 내부에 거처한다는 인식이다. 그노시스의 인간은 하늘에서 떨어진 불꽃이며, 스스로의 기억을 통해 다시 플레로마, 즉 충만의 세계로 돌아간다. 프리메이슨의 인간은 육체의 성전 안에서 영혼을 새로 짓는다. 그들에게 건축은 곧 구원이다. 하나는 우주의 청사진을 그렸고, 다른 하나는 그 설계도를 인간의 내면에 세웠다.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관하여

빛 역시 두 전통의 심장이다. 그노시스에서의 빛은 잃어버린 신의 파편이며, 프리메이슨의 입회식에서 신참이 받는 ‘빛’은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의식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무지에서 앎으로의 이행. 그것이 두 전통이 공유하는 영원한 통과의례였다.

 

3. 르네상스의 재탄생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고대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피코 델라 미란돌라, 피치노, 브루노 같은 이들이 플라톤 아카데미를 세우고 헤르메스의 지혜를 되살렸다. 그들은 신과 인간의 경계가 없다고 믿었다. 브루노는 말했다. “인간은 신의 불꽃을 내면에 지닌 존재이며, 그 불꽃이 우주 전체와 하나 될 때 신을 안다.” 이 사상은 프리메이슨의 철학적 토대를 이루었다.

 

이후 계몽의 세기가 열리며 프리메이슨은 그노시스의 신비를 이성의 언어로 번역했다. 그들은 종교 대신 도덕을, 신의 은총 대신 인간의 완성을 말했다. 그노시스가 영혼의 구원을 설파했다면, 프리메이슨은 사회의 계몽을 꿈꾸었다. 신비는 세속의 옷을 입었고, 종교적 불꽃은 합리의 등불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프리메이슨은 근대의 세속화된 그노시스 교단이 되었다.

4. 빛의 유전

그노시스와 프리메이슨의 관계는 단순한 조직의 계보가 아니다. 그것은 사상의 유전, 불빛의 계승이다. 그노시스는 신의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프리메이슨은 무지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다. 구원의 언어는 달랐으나 믿음의 근원은 같았다. 인간은 스스로의 앎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신념.

차이는 있다. 그노시스는 우주의 구조를, 프리메이슨은 인간 사회의 질서를 탐구했다. 하나는 천상의 설계를, 다른 하나는 지상의 건축을 그렸다. 그러나 그들의 불빛은 같은 원천에서 나왔다. 인간이 신을 찾아 나서는 가장 오래된 본능, 그 불안과 열망이 두 전통을 이어주었다.

요컨대 프리메이슨은 그노시스의 껍질이며, 그노시스는 프리메이슨의 영혼이다. 세월이 흘러도 그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인간은 여전히 빛을 찾아 길을 걷는다.

🌟엘레아 학파의 특징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