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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입을 독점한 마지스테리움에 관하여

winter-art 2025. 12. 9. 17:04

 

가톨릭이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붕괴하지 않고 거대한 단일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신앙심이나 사랑 같은 추상적인 단어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 마지스테리움의 의미

그 핵심에는 마지스테리움(Magisterium), 즉 교도권(敎導權)이라 불리는 강력하고도 무시무시한 통제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것은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과 교리에 대한 해석을 오직 교황과 주교단만이 독점한다는 ‘진리의 전매특허권’이다.

 

개신교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해석의 차이로 인해 수만 개의 교파로 쪼개졌다. 가톨릭은 이 위험성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텍스트(성경)는 말이 없고, 그것을 읽는 인간은 제멋대로다. 따라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텍스트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확정해 줄 절대적인 심판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마지스테리움이다.

2. 절대적 가이드 라인

가톨릭에서 평신도나 개별 사제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권한이 없다. “토비트서는 영감받은 책인가?”, “연옥은 존재하는가?” 같은 질문에 대해 개인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마지스테리움이 “그것은 진리다”라고 선포하면, 그것은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닌 복종의 대상이 된다. 국가로 치면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도 같다. 판결이 내려지면 불만은 있을 수 있어도 법적 효력은 절대적인 것처럼, 교도권의 결정은 신자들의 사고 영역을 규정하는 절대 가이드 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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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스템의 정점에는 ‘교황 무류성(Papal Infallibility)’이라는 파격적인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해 정식으로(Ex Cathedra) 선포한 교리는 결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파국을 막기 위한 시스템적 안전장치다. 최종 결정권자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 조직은 끝없는 논쟁에 휘말린다. 따라서 가톨릭은 교황이라는 인격체가 아니라, 그 직책이 수행하는 기능에 ‘오류 없음’이라는 신성한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논쟁을 강제 종료시킨다.

 

앞서 이야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대대적인 리브랜딩이 가능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지스테리움이 “이제부터는 엄숙주의 대신 사랑과 대화를 강조한다”라고 노선을 변경하면,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는 일사불란하게 그 방향을 따른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진리에 관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절대군주제에 가깝다.

 

3. 질서와 억압의 경계

현대인의 시각에서 마지스테리움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적인 시스템으로 보일 수 있다. “내가 믿는 것은 내가 판단한다”는 근대적 주체성을 정면으로 거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강력한 사상 통제 시스템 덕분에 가톨릭은 시대의 유행이나 정치적 압력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들의 원형을 보존해 왔다.

 

마지스테리움은 신자들에게 “너희는 해석하려 하지 말고 듣기만 하라”고 말한다. 이는 지적 태만을 유도하는 우민화 정책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복잡한 신학적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강력한 내비게이션일 수도 있다. 신의 입을 독점한 권력, 그것이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지탱하는 가장 차갑고도 단단한 뼈대다.

4. 가톨릭의 정치적 스탠스

현대 정치 지형에서 가톨릭,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 체제의 행보는 종종 급진 좌파의 아젠다와 겹쳐 보인다. 기후 위기를 경고하고, 난민을 옹호하며, 자본주의의 탐욕을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은 보수적인 개신교나 우파 정치 세력의 눈에 의심스러운 붉은 색채로 비치곤 한다. 하지만 가톨릭이 좌파적 스탠스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단순히 현대 정치의 좌우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 이는 2천 년 된 거대 조직이 생존을 위해 선택한 독자적인 노선이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신에 대항하는 그들만의 오래된 전쟁 방식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우선적 선택: 마르크스보다 오래된 구호

가톨릭이 좌파적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핵심 교리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때문이다. 얼핏 보면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 해방론과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그 기원은 계급 투쟁이 아니라 성경이다. 예수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과 어울렸다는 팩트에 근거하여, 교회는 부자가 아닌 빈자의 편에 서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가르친다.

 

19세기 말, 산업혁명의 그늘에서 노동자들이 착취당할 때 교황 레오 13세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라는 회칙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의 무신론을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이윤 추구를 강력히 비판하며 노동조합 결성권과 임금 정의를 옹호했다. 즉, 가톨릭은 태생적으로 시장 만능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에게 돈은 수단일 뿐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무제한적 자본주의는 또 다른 형태의 우상숭배로 간주된다. 이 반자본주의적 정서가 현대의 좌파적 경제관과 겹쳐 보이는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해방 신학: 십자가와 혁명의 결합

가톨릭이 좌파 이미지로 굳어진 결정적인 역사적 계기는 1960~80년대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해방 신학이다. 군사 독재와 극심한 빈부 격차 속에서 남미의 사제들은 성경을 사회 변혁의 텍스트로 읽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재자의 궁전이 아니라 빈민굴로 들어갔고, 심지어 일부는 수단(사제복)을 벗고 총을 들고 게릴라가 되었다.

 

"가난은 신의 뜻이 아니라 구조적인 악이다." 이 파격적인 선언은 가톨릭을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혁명의 배후 세력으로 만들었다. 당시 보수적인 바티칸 지도부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었다며 제재를 가했지만, 풀뿌리 교회에서 피어난 이 저항 정신은 현대 가톨릭의 사회 참여 DNA에 깊이 박혔다. 현재 남미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서 해방 신학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동체주의: 개인보다 우리가 먼저

구조적인 측면에서도 가톨릭은 우파의 핵심 가치인 개인의 자유(Libertarianism)보다는 좌파의 가치인 공동체의 연대(Solidarity)에 가깝다. 앞서 언급한 마지스테리움(교도권) 시스템만 봐도 그렇다. 가톨릭은 철저한 중앙집권적이고 하향식(Top-down) 조직이다. 개인의 판단보다 조직의 결정과 공동선의 가치를 우위에 둔다.

 

우파가 "각자 알아서 성공하라"는 능력주의를 지향한다면, 가톨릭은 "우리는 한 몸이다"라는 유기체적 공동체론을 지향한다. 한 지체가 아프면 몸 전체가 아프다는 논리다. 따라서 국가나 사회가 개입해서라도 약자를 보호하고 부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복지 국가를 지향하는 사회 민주주의의 노선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이는 정치적 성향이라기보다는, 가톨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유지해 온 전체주의적(Holistic) 세계관의 발로다.

제3의 길: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러나 가톨릭을 단순히 좌파라고 규정하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그들은 경제와 환경 문제에서는 좌파와 손을 잡지만, 낙태, 동성애, 안락사 등 생명 윤리 문제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경한 극우적 스탠스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생명은 신의 영역이기에 인간이 함부로 손댈 수 없다는 원칙은 타협 불가능하다.

 

결국 가톨릭의 스탠스는 좌파냐 우파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근대 이후 생겨난 좌우의 정치 프레임보다 훨씬 오래된 전근대적(Pre-modern)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눈에 자본주의(우파)는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고, 공산주의(좌파)는 신을 부정하는 오만함이다. 가톨릭은 이 둘 모두를 비판하며 인간의 존엄과 공동선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자적인 제3의 길을 걷고 있다. 현대 정치의 눈으로 볼 때 때로는 붉은색으로, 때로는 푸른색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이 걷는 길이 이 세상의 정치 지도 위에는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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